아무튼, 인기가요 - 오늘 아침에는 아이유의 노래를 들으며 울었다 아무튼 시리즈 39
서효인 지음 / 제철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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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 역시도 라디오에서 카세트테이프에서 시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으로 그 시절을 살았다. 맘만 먹으면 불량소녀 정도는 될 수 있었는데. 아닌가. 불량소녀 맞나. 아침에 학교 가기 싫어서 그대로 버스에서 안 내리고 도서관으로 가고 야자 빠지고…. 그랬는데. 그 불량은 저 불량과는 달랐을 테지. 저 불량을 저지르기에는 소심하고 겁이 많았다. 눈에 띄지 않는 정도로 일탈을 감행했다.


여름방학이었다. 보충 수업은 가지 않았고 문을 열어 놓고 음악을 들었다. 라디오를 틀어 놓으면 시간 가는 줄, 알게 된다. 음악이 끝나면 디제이의 멘트가 끝나면 시보가 나왔으니까. 시간 가는 줄 알면서 듣는 음악은 이러했다. 인기가요들. 산타나의 〈Smooth〉. 이승철의 〈오직 너뿐인 나를〉. 임재범의 〈너를 위해〉. 라디오 채널이 바뀌어도 이 세곡은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그중에 토이가 있었다. 감성 변태라고 불리던 유희열이 진행하는 《음악도시》. 느지막이 일어나서 《두시의 데이트》를 듣고 중간에 밥 먹고 잘 나오지 않는 텔레비전을 겨우 달래서 보다가 누워서 책을 읽다가 《음악도시》까지 달렸다. 펫 매스니, 카디건스,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 브라이언 맥나잇. 한국의 지방 도시에서 문화적 혜택을 1도 누리지 못하던 불량소녀는 덕분에 문학소녀가 될 수 있었다. 뜻도 모르지만 분위기는 묘한 노래를 들으면서 일기장을 채울 수 있었다.


마이마이가 있었다. 충전은 잘되지 않아 건전지를 옆으로 달고서 음악을 들었다. 테이프를 A 면과 B 면으로 수동으로 바꿔줘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파나소닉으로 갈아탔다. 테이프를 한 번 넣으면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B 면으로 돌아갔다. 찰칵. 찰칵이 있었다. 찰칵하는 소리가 나면 음악이 바뀌면서 보고 있던 세상의 빛깔도 달라졌다.


그러니까 노래는 기억을 불러오는 주술과 다름없는 것이다. 중학교 2학년은 대체로 용감하고 대책 없고 삐딱하고 뜨거워서 무슨 기억이든 아주 오래 머리와 몸에 남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열다섯 살에게는 실수하지 않는 게 좋다.

(서효인, 『아무튼, 인기가요』中에서)


『아무튼, 인기가요』는 어눌하고 소심하고 그러나 반항심에 찌든 그때의 나를 파나소닉의 카세트테이프 돌아가는 소리인 찰칵과 함께 재생 시켜 주었다. 인용한 부분의 말처럼 열다섯 살에게는 실수하면 안 된다. 모조리 다 기억한다. 세상의 중심은 나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나이이므로. 학교 앞에는 레코드 점이 있었고 시내로 나가면 신나라 레코드가 있었다.


급하면 학교 앞으로 갔고(대개 신보가 막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침에 지나가다 매직으로 쓴 종이를 보았을 때 포스터 증정까지라는 문구가 있으면 빛에 이끌리는 좀비처럼 들어가서 빨간색 딸기 지갑에서 돈을 꺼내 테이프를 샀다. 돈이 더 있는 걸 확인하면 시디도 샀다. 같은 가수의. 참으로 비효율적인 소비 패턴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여유가 있으면 신나라 레코드로 갔다. 그곳은 뭐랄까. 입구부터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곳이었다. 시내 중심가라지만 걸어서 오분이면 이 끝과 저 끝을 왕복하는 시내에서 유일하게 도시적 세련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규모만 다를 뿐 음악이 넘쳐흐르는 곳에서 듣고 샀던 가수의 음반 리스트를 『아무튼, 인기가요』에서 조우했다. 아.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지역만 다를 뿐 비슷한 음악을 들으며 말도 안 되는 교육을 받으며 살았구나. 반가움도 있었다. 지금 듣는 음악 리스트는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동년배. 오마이걸의 〈Dolphin〉을 들어보라고 하기에 들었다. 스포티파이를 구독하는데 한 번 오마이걸을 들으니 비슷한 음악으로 추천해 준다. 고오맙다. 취향에는 차이가 있으니까. 그걸 존중해야 하니까.


다시 원래 듣던 음악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지금은 무얼 듣냐면 백예린과 권진아와 볼빨간 사춘기와 위위와 롤러코스터와 S.E.S. 스포티파이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고 하니까 90년대 베스트 음악을 추천해 주었다. 아닌데. 나 2020년대를 사는 사람인데. 웬 90년대? 그래도 들어볼까 한 번 들어보지 뭐 하다가 중독되었다. 아주 미쳐버리겠다. 왜 나 가사 다 아는데? 영턱스클럽과 언타이틀과 듀스와 서태지와 아이들과 핑클과. 말을 말자. 모두 내가 산 음반의 가수들이다.


내가 돈이 없지 감수성이 없냐. 식으로 엄마 일하는 곳과 엄마 사는 곳에 가서 돈을 뜯어 음반을 샀다. 엄마 미안해. 엄마도 힘들었을 텐데. 그래도 돈 줘서 고마워. 소니가 있었다. 아무래도 테이프는 불편했다. 파나소닉으로 계속 가고 싶었지만 좋아하는 음악을 반복해서 듣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했다. 뒤로 감기를 하고 멈춤을 눌러야 하는 정확한 타이밍을 익혀야 하는 노력과 기술.(나중엔 그걸 잘했다. 뒤로 감기 버튼을 부르고 삐리릭 테이프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잠깐 쉬었다가 정지 버튼과 재생 버튼을 동시에 누르는.)


엄마 찬스를 쓰자. 엄마 또 미안해. 소니 시디플레이어를 사니 부드러운 파우치를 주었다. 알지? 양쪽 줄을 잡아당기면 복주머니 스타일로 되는. 소중한 소니. 리피트 버튼을 눌러 놓으면 무한 반복으로 한 곡을 들을 수 있었다. 한 곡이 있었다. 가방에 넣고 이어폰 줄 한가운데에 있던 조작 버튼을 눌러가며 학교와 집을 다니던 키 작은 내가 보인다. 롤러코스터와 윤상을 들었다. 〈어느 하루〉와 〈우연히 파리에서〉. 교과서 보다 열심히 봤던 가사집. 가사집을 보면서 노래를 들었으니 안 외워질 리가 없었다.


그러니 90년대 베스트 추천 음악을 들으면서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는 거다. 『아무튼, 인기가요』를 읽는 내내 그립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시절을 떠올렸다. 내가 피해를 받을망정 남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하는 지금의 내가 있다. 한동안의 플레이리스트는 이러했다. 출근할 때 힘이 나는 노래. 쉼이 필요할 때 듣는 음악. 뇌의 휴식을 주는 노래. 아무리 진정하려 해도 진정이 되지 않아 심장이 두근대고 호흡이 힘들었다. 버텨야 한다고들 하는 데 그럴 필요 없다. 버티면 죽는다. 잘 새겨 들어. 문학소녀가 말하는 거니까.


오마이걸의 〈Dolphin〉 받고 위위의 〈멀어지지 않게〉 그리고 임재범의 〈이 밤이 지나면〉.



#플레이리스트


이승철


오직 너뿐인 나를


산타나


Smooth


본조비


It's my life


롤러코스터


어느 하루


윤상


우연히 파리에서


백예린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


권진아 


다 알면서(feat. 박재범)


위위


멀어지지 않게


S.E.S


너를 사랑해


카디건스


Carnival


이규호


머리끝의 물기


임재범


이 밤이 지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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