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디 얀다르크 - 제5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염기원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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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될 때마다 귀가 가렵다. 더러운 거 아는데 그럴 때마다 손가락을 넣어 귀를 판다. 피가 나고 나중에는 염증이 생겼다. 병원 가기 싫어서 몇 년 전에 처방받은 연고를 면봉에 묻혀서 임시 조치를 했다. 감기에 걸려서 어쩔 수 없이 병원에 갔을 때 석션으로 코를 뚫고 그전에 코로나 검사도 하고 음성이어서 속으로 다행, 다행 그러면서 의사에게 귀에서 피가 난다고 했다. 의사는 귀 건드리지 마세요 했다. 네네네.


다행히 위병은 없는 듯. 역류성 식도염 그런 것도 없고. 불면증도 없다. 너무 잘 자는 게 문제. 베개에 머리가 닿으면 침을 질질 흘리면서 잔다. 그러고도 주말에 낮잠을 기본 세 시간 때린다. 염기원의 장편소설 『구디 얀다르크』의 주인공 사이안은 직장에 다니는 내내 불면증에 시달린다. '야근해도 정시출근, 회식해도 정시출근, 야근과 회식이 없어도 새벽 네 시가 되어야 잠드는 생활을 수없이 반복했다.' 이안의 불면증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구디 얀다르크』는 센스 있는 자라면 알겠지만 구로디지털단지, 이안과 잔다르크를 줄인 말이다. 과거 경공업 중심의 산업화 시절에 구로공단은 섬유 및 의류공장으로 가득했다. 지금은 지방으로 공장이 이전하고 IT 기업, 벤처 중심의 스타트업 회사들이 들어섰다. 이름도 구로디지털단지로 바뀌었다. 그곳에서 불면증 때문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이안이 IT 회사에 입사하고 그 또한 불면증 덕분에 업무에 쉽게 적응한다. 


발주 물량을 맞추기 위해 각성제를 먹어가며 일하던 여공은 잠을 자고 싶어 수면제를 먹으며 미싱 대신 컴퓨터 앞에 앉은 이안으로 21세기에 도착해 있다. 술자리에서 하는 불행 배틀은 지겹다. 쇼미 더 불행도 아닌데 다들 술만 마시면 자기 살아온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영혼 조금 담아 호응을 해주지만 힘들다. 여기 안 힘든 인간이 어딨냐. 내가 썰을 안 풀었다 뿐이지 장난 아니다.


책으로는 괜찮다. 이안 역시 한 불행했다. IMF 때 은행에 다니던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그 일 이후 엄마는 키친드렁커가 되었다. 엄마는 헌신했던 교회에서도 버림받았다. 시집 식구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이안은 불면증을 힘 삼아 공부를 하고 대학에 간다. 힘들어하는 엄마를 외면하며 대학 생활을 즐기지만 이마저도 엄마의 잘못된 선택으로 어려워진다. 이안은 간신히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간다. 


회사에 들어가면서 고통은 증폭된다. 업무는 그렇다 치고 인간들은 왜들 그러는지. 다들 퇴사의 이유 중에 하나가 인간관계 때문인 거죠. 『구디 얀다르크』는 IT 회사와 스타트업에서 벌어지는 악독한 근로 환경을 고발한다. 이안은 산전수전 다 겪으며 노조를 설립한다. 이안이 아침에 일어나는 걸 힘들어하면서도 꾸역꾸역 회사에 다니는 장면에서 그게 싫어 회사를 차려 대표가 되었지만 월급날이 기다려지는 게 아닌 무서워하는 장면에서 사는 건 별거 없다. 그저 죽을 때까지 죽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농협 간부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의 기사를 보게 되었다. 젊은 나이였다. 그가 남긴 글과 지인들의 이야기는 슬프고 힘들었다. 『구디 얀다르크』의 결말이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자주 내가 아닌 것처럼 굴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육성으로 파이팅 외쳐주는 누군가가 옆자리에 있으면 좋겠다. 잘 싸우자, 잘 싸워라. 너도 나도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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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이해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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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수영을 이해했다. 아니 이해하고 말았다. 감히 이해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혁진의 소설 『사랑의 이해』는 제목만 들으면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처럼 사랑 담론서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데 소설의 형식을 취한 이해 불가능한 사랑을 네 남녀를 등장시켜 풀어낸다. 풀어낸다고 썼지만 매듭을 지을 수 있는 건 소설을 끝까지 읽고 오랫동안 상수, 미경, 수영, 종현을 잊지 못하는 독자의 몫이다. 


건조한 문체의 소설이다, 『사랑의 이해』는. 간단하게 말하면 은행에서 벌어지는 네 남녀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인데 간단하게 말해지지 않는 소설이다, 『사랑의 이해』는. 그 옛날 《사랑의 스튜디오》 버전 식으로 얘기하자면 네 남녀가 쏘는 사랑의 막대기는 어긋나기만 한다. 상대가 관심을 표하면 일단 받아들인다. 그러고 생각한다. 내가 저이를 사랑하는 걸까. 


관심과 위로에 목말라 있는 현대 사회에서 나누는 애정결핍으로 가득 찬 연애를 그리고 있다. 다시 안수영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영되고 있어 원치 않아도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뜬 《사랑의 이해》 클립을 보고야 말았다. 덕분에 책을 읽기도 전에 여주인공의 이미지를 획득했다. 그래 그건 좋고. 활동하지 않는 뇌세포를 굳이 깨울 필요 없게 도와준 거니까. 


문가영=안수영으로 가고 유연석=하상수로도 가면서 『사랑의 이해』 속으로 쉽게 쉽게 진입할 수 있었다. 소설 다 읽고 드라마 봐야지 했던 건 결말을 미리 알고 싶고 한 권의 소설을 16부작으로 늘였으면 이야기 진행이 더딜 것이라는 짐작 때문이다. 이제 나는 결말을 알고 주인공의 미래까지도 아는 전지적작가시점으로 드라마를 볼 수 있는 권한이 생겼다. 『사랑의 이해』를 읽으므로써. 


아. 안수영. 이제 진짜 안수영 이야기. 소설의 결말로 나아가면 안수영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염려가 든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생각했다. 상수는 끝까지 수영의 행동을 이해 못 한듯싶다. 왜, 왜 그랬어? 수영아를 묻고 싶지만 참는다. 나는. 수영이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었다. 경향신문 젠더기획팀이 지은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차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설명하기 어려워졌을 뿐이다.'


은행에서 벌어지는 직장 로맨스 성격을 띠는 『사랑의 이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느 직장에서나 벌어지고 있는 차별 서사도 다루고 있다. 수영은 창구 직원인 텔러이고 종현 역시 계약직 청경이다. 상수나 미경은 행원으로 분명하게 계급이 나누어진 채 사랑을 시작한다. 수영을 두고 회식에서 나누는 쓰레기 같은 대화들. 능력이 있음에도 외모와 언행으로 말해지는 수영의 업무. 자신을 뻔히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아는 상수 앞에서는 할 말을 다 하지만 집세와 생활비를 생각하느라 정작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술자리에서의 수영의 머뭇거림. 


그런 수영의 머뭇거림을 알아채고 부당함을 부당하다고 알려주는 인물의 등장. 그래서 수영은 새벽에 전화를 건다. 


가장 솔직해져야 할 사랑 앞에서 자신의 진심을 감추고 왜곡하는 인물들을 통해 이제 사랑조차 중산층만 가능해질 것이라는 예언을 한다. 조건과 조건을 따져가며 조건 밖에는 남지 않는 연애의 끝은 쓸쓸하다 못해 허무와 후회에 자책이 뒹군다. 사랑의 이해라고 했지만 사랑은 이해가 가능하지 않다는 걸 내내 외치고 있다. 이해하려 할수록 알 수 없게 되는 정답 없이 오답풀이만 가득한 사랑이라는 난제를 받아든 우리는 상대에게 무얼 줄 수 있을까. 


준다고 해봤자 오해하기 딱 좋은 이상한 진심 밖에는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이해하려고 하지만 수영이라는 인물을 초반부에 그리는 방식은 여전히 전형적이고 틀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중간과 끝으로 가기 위한 빌드업이었겠지만 이는 작가가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상수는 수영을 이해하지 못했다. 수영도 그걸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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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서머스 1~2 세트 - 전2권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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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페인트칠을 하다가 미칠 집에서 배운 게 있다면 이 세상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이렇게 둘로 나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TV를 보며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이 세상은 셋으로 나뉘었다. F.W.S. 멀킨 보안관보가 내게 가르쳤던 것처럼 가끔 참아 가며 사이좋게 지내는 사람들이 세 번째 부류다. 이 세상 사람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하는 회색 인간들이다. 그들은 (최소한 일부러는) 나를 해치지 않지만 나를 돕지도 않는다. 네 마음대로 살되 하나님의 가호가 있길 바란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세상은 각자 알아서 살아가야 하는 곳이다.

(스티븐 킹, 『빌리 서머스』中에서)


대체 스티븐 킹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한계란 게 있긴 한 걸까. 킹의 신작 소설 『빌리 서머스』를 읽으며 든 생각이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경이와 찬탄이 들었고 소설이 끝나갈 때는 슬픔에 빠졌다. 초자연적이고 불가해한 상황을 주요 소재로 쓰며 호러킹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문학킹, 이야기킹, 서사킹으로 바뀌어야 한다. 대중소설가로 각인되어 있지만 그의 소설 안에는 문학의 아름다움이 한가득이다.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을 위한 마음을 잃지 않는. 


전직 해병대 출신 저격수 빌리는 호텔 로비에 앉아 만화책을 손에 든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만화책은 사람들에게 바보 빌리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고 실제 그는 『테레즈 라캥』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두 남자가 빌리를 태우러 오고 빌리는 닉의 집으로 간다. 닉은 빌리의 나이를 묻고 그가 은퇴하기 전에 한 건을 더 하기를 제안한다. 한 건이란. 청부 살인이다. 


보수가 200만. 50만은 착수금, 나머지는 이후에 지급하는 조건이다. 빌리는 휘파람을 불고 닉에게 상대가 나쁜 놈이냐고 묻는다. 일을 하기 전에 늘 하는 빌리의 질문. 빌리는 나쁜 놈만 처단한다. 킬러에게도 신념이 있다면 그런 것이다. 나쁜 놈만 죽인다. 닉은 설명한다. 타깃은 빌리와 같은 일을 하는 직군. 대신 그는 상대가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 가리지 않고 죽인다. 조라고 지칭한 그는 학교에 가던 열다섯 살짜리를 제거한 전적이 있다. 


저격수가 저격수를 저격해야 하는 상황. 빌리는 조의 만행을 더 듣고 일을 착수한다. 그때부터 빌리는 신분 위장을 하고 대기한다. 빌리라는 이름 대신 데이비드 로크리지로 저격수라는 직업 대신 작가로 위장한다. 조를 저격하기 위해 대기하는 장소에서 빌리는 작가 행세를 한다. 처음에는 일을 의뢰한 일당들을 속이기 위해 글을 썼지만 나중에는 글쓰기라는 구원자를 만난다. 문장과 어법을 엉터리로 쓰면서 시작했지만 글을 쓸수록 바보 빌리가 아닌 그냥 빌리를 불러낸다. 


『빌리 서머스』 초반 줄거리의 내용은 이렇다. 어떤가 읽고 싶지 않은가. 킬러가 글을 쓰기 시작한다. 어쩌다가 그가 킬러가 됐는지 궁금하죠. 은퇴 전에 맡은 마지막 일을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내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대하소설이 될 거라고. 엄청난 일들이 닥쳤고 나는 그걸 이겨냈다고. 그런 사람들치고 진짜 글을 쓰는 사람은 없는 거죠. 『빌리 서머스』의 빌리는 해낸다. 조를 쏘기 전까지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작가 행세를 했지만 그는 진정한 작가로 거듭난다. 


작가면 작가지 진정한 작가가 무엇인가. 소설이 끝나면 등장인물들의 내일은 어떻게 될까. 작가가 정해준 결말대로 끝이 나는 건가. 『빌리 서머스』의 빌리는 킹이 정해준 결말대로 살지 않을 것이란 암시가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행복한 결말이 이제는 통용되지 않고 열린 결말로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는 게 트렌드라고 하는 시대에 스티븐 킹 역시 『빌리 서머스』의 결말을 열어준다. 


빌리의 말처럼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면서 나를 해치지도 않지만 도와주지도 않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빌리는 어떤 사람이냐면. 소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빌리는. 


초자연적이고 이해 불가능한 건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현상 아닐까. 스티븐 킹은 그걸 깨달은 듯하다. 어린 시절 무서워하던 존재가 어른이 되어서도 나타나고 불이 저절로 켜지고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인간이 있는 일 보다 곤경에 처한 이를 구해주는 일이 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말이다. 


빌리 만세, 스티븐 킹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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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 명함만 없던 여자들의 진짜 '일' 이야기 자기만의 방
경향신문 젠더기획팀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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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처와 전화를 하다가 나를 소개해야 할 때가 있다. 상대는 자신의 명함을 보내줄 테니 나도 명함을 보내 달라고 한다. 나는 명함은 없다고 이름을 말해준다. 전화기에 찍히는 번호로 연락을 주면 된다고. 종이 명함만 봤는데 이미지 명함도 있구나. 명함을 파면 이미지도 주는 걸까. 아직도 이런 걸 모른다. 직함과 회사, 이름, 번호가 있는 명함을 본다. 다들 명함이 있나. 


오랫동안 명함이 필요한 일을 하지 않았다. 어디 가서 나를 소개할 일이 없었다. 직함이 없는 일들을 했다. 경향신문 젠더기획팀에서 지은 책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는 그렇게 직함과 명함이 없는 일을 한 여성의 노동을 소개한다. 책의 표지에는 두 가지 문장이 쓰여 있다. "명함만 없던 여자들의 진짜 '일' 이야기"와 "나쁜 일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첫 번째 출근길」을 소개하는 문장은 '잘 봐, 언니들 인생이다.'이다. 책으로 들어가기 전 선전포고 같은 이 문장을 보면서 가슴이 떨렸다. 여성 댄서들의 배틀 장면에서 나온 '잘 봐, 언니들 싸움이다'를 패러디 한 문장은 그해가 지나고도 사람들에 입에 오르락내리락했다. 언니들이 여기에 있다. 언니들이 춤을 춘다. 언니들이 싸운다. 언니들이 살아간다. 오빠들만 난무하던 이 판에 언니들이 등장했다는 결의가 담긴 선언이었다. 


서울 남대문시장 칼국수 골목에서 '훈이네'라는 간판을 달고 20년째 밥을 짓는 손정애 씨의 인터뷰를 시작으로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는 명백히 보이는 곳에서 노동을 했지만 보이지 않는 척을 했던 여성들의 '진짜 일'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양한 연령에서 필수 노동을 하는 여성들은 책의 소개 글처럼 명함만 없을 뿐 자부심과 의지를 가지고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1950년대 이후에 태어난 여성들은 교육의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은 게 일상적이었다. 여자가 배워서 뭐에 쓰냐는 어느 집에서나 통용되는 말이었다. 더 배우고 싶은 갈망이 있었지만 오빠나 남동생을 위해 가난한 집안의 경제를 위해 여자아이들은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공장에 들어가거나 남의 집 살이를 하고 작은 회사의 경리로 들어가 결혼 직전까지 집안의 경제를 책임졌다. 


결혼과 동시에 퇴사는 그 시절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얼굴 몇 번 보지 않은 남자와 결혼을 하고 그 남자의 집안을 또 책임져야 하는 굴레에 갇힌다. 언니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나쁜 일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쓰려지지 않았다. 가사 노동을 하면서도 배우고 봉사활동을 했다. 글을 몰랐던 시절의 서러움을 극복하고자 노인대학에 나가 한글을 배운다. 


동일한 일을 하는데도 동일 임금을 받지 못한다. 일을 하고 돌아와도 남자는 그대로 집에서 쉰다. 여자는 가정으로 다시 출근이다. 사회와 구조가 여성 노동의 시스템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오로지 개인이 책임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책에 소개된 여성들은 나이가 먹어도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의 오늘에 감사해한다. 내가 벌어서 쓴다는 자부심으로 힘든 노동 현장에서 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임, 과장, 차장이라는 직함이 적힌 명함이 아닌 육아 전문가, 맏언니, 고등학생, 재테크 마스터, 가사노동자가 쓰인 명함이 사람들의 손에 주어질 날을 기다린다. 이게 뭐지가 아닌 당연하게 그렇구나 이 사람의 일은 이렇구나 받아들여질 사회를 위해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는 첫 발을 내디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집순이, 한국문학 애호가, 라춘러버 정도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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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여자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4
이서수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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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몸무게를 잰다. 1차 다이어트 이후 요요가 왔고 다시 2차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몸무게는 더디게 줄어들다가 이제는 빠르게 늘고 있다. 아침에 눈 뜬 것만으로도 힘든데 몸무게 숫자를 보면 더더욱 힘이 나질 않는다. 대체 내가 어제 먹은 게 뭐였더라. 비만도는 정상이지만 저체중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병인 것 같은데. 


이서수의 소설 『몸과 여자들』의 주인공 1983년생 '나'는 어렸을 때부터 마른 몸 때문에 주위의 불편한 시선을 견뎌야 했다. 엄마와 함께 다닐 때면 친구들이 다가와 몸에 대해 한 마디씩 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반에서 제일 작다는 이유로 또래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마르다는 이유로 관계에서 배제 당한 채 지냈다. 


그랬구나. 마르다는 것도 괴롭힘의 이유가 될 수 있었구나. 내가 그토록 동경한 마른 몸도 누군가에게는 콤플렉스로 작용했구나. 나의 보편은 일방적인 사유였다. 다이어트를 시작한 건 단순한 이유였다. 살이 자꾸 찌니 무릎이 아팠다. 건강한 몸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간절함이 있었다. 그러다 앞자리 숫자가 바뀌자 집착이 생겼다. 더 말랐으면 좋겠다. 


몸무게 강박이 생겼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타인이 내게 다이어트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내 몸에 대해 판단을 하거나 조언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나 스스로가 나에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밀었다. 『몸과 여자들』에서 '나'는 타인이 바라보는 '나'의 몸에 대해 재고한다. 타인의 시선을 거두자 나의 시선이 남았다. 사회와 제도가 요구하는 여성 몸에 대한 조건들을 해체한다. 


소설은 1983년생 '나'와 그의 엄마 1959년생 '미복'의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된다. 엄마와 딸이 들려주는 자신의 몸 이야기는 처절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원하지 않는 행위의 강요들이 딸과 엄마의 인생을 지배한다. 나의 몸은 나의 것이다는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시행착오가 『몸과 여자들』에 나열된다. 시선 폭력으로부터 혹은 진짜 폭력으로부터 나의 몸을 지켜가는 여정은 고통에 가깝다. 


접힌 배를 들킬까 봐 큰 옷을 입고 다녔다. 살이 어느 정도 빠진 지금도 여전하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데 나만이 나를 엄격하게 바라본다. 어제 보다 몸무게가 늘었단 말이지. 이거 이거 안 되겠는데. 나를 몸으로만 바라보는 강박을 『몸과 여자들』은 버리라고 말해준다. 나는 몸이 아닌 그냥 나라는 존재로 긍정해야 한다고도. 살이 찌거나 빠지거나 상관없이 나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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