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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는 일 - 동물권 에세이
박소영 지음 / 무제 / 2020년 12월
평점 :
우리가 문학과 영화를 접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우리는 '생득'을 벗어나기 어렵다. 인종, 성별, 성적 지향 등 타고난 조건이 사고를 지배한다. 내 입장과 처지를 벗어나 다른 이의 삶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문학과 영화는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딛고 선 자리를 벗어나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것. 불완전하게나마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 책과 영화를 통해 우리는 다시 태어나지 않고도 타인의 존재를 감각할 수 있다.
(『살리는 일』中에서, 박소영)
이왕 이렇게 된 거 책이나 읽어보자는 심사다. 뭐, 언제는 책 안 읽고 살았나. 그게 아니라 본격적으로 읽어 보자는 거. 언제는 본격적으로 안 읽고 살았나.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유일한 취미이자 오락거리가 '독서'면서 왜 이런 말을 할까. 상황을 바꿔 보자는 뜻이다. 대학교에서 보낸 시간을 제외하곤 일하면서 일 때문에 걱정하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더랬다. 지나고 나니 대학 시절은 좋았네. 마음대로 책을 읽고 책 많이 읽었다고 칭찬도 들었던 유일한 시기였다.
회피하고 싶어서 백수로 보내는 기간을 세어 보질 않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달력을 보니 7개월이 되어간다. 겁나 빠르다, 빨라. 첫 달에는 학원 다니고 자격증 따서 바로 취직해야지 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우리네 인생. 너무 떨려서 시험 한 번 망하고 다시 본 시험에서 합격했다. 기쁠 줄 알았는데 막상 호들갑을 떨 만큼 기쁘지 않았다. 매일 아침 메일함에 '담당자가 이메일 입사지원서를 열람했습니다.'라는 제목의 메일만 보기 때문일지도.
마음이란 게 무겁고 넓어서 다 비울 순 없어 조금씩 덜어내고 있다, 부정적인 마음의 일부를. 어떻게? 잘하는 거 하면서, 책 읽는 거. 일단 살고 봐야지. 박소영의 『살리는 일』은 제목이 주는 위안 때문에 읽었다. '동물권 에세이'라고 분류되어 있다. 책에는 동물, 인간을 나누지 않고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한 따뜻함이 담겨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살리는 일이 된다. 집 앞에 생긴 편의점 한 쪽에는 고양이 사료와 물이 담긴 그릇이 놓여 있다. 편의점 주인이 놓아둔 듯했다.
그걸 보고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는 베란다에 마련된 캣타워에 앉아 있는 고양이 세 마리와 만난다. 이름을 몰라 '행고'라고 부른다. 행운의 고양이라는 뜻의 줄임말이다. 매일 두 번씩 만나니까 너희들을 보면 행운이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붙였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손을 흔든다. 안녕, 행고. 이제 집으로 들어와 씻고 누워 있으면 화장실 환풍기를 통해 고양이 울음소리를 듣는다. 윗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의 소리다. 쟤는 꼭 화장실에서 운다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들 정도로 화장실에서 존재감을 발휘한다.
이것이 나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의 고양이 이야기다. 하나 더 있다. 어렸을 때 문 열어 놓고 외출했는데 돌아오니 고양이들이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니 후다닥 달려 나갔다. 또 있는데 이제 그만. 『살리는 일』에 대해 써야지. 저자 박소영은 캣맘이다. 동생과 함께 고양이 급식소에 사료와 물을 놓아 준다. 아픈 애들이 있으면 구조 한다. 동물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전과 후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고백한다. 과거의 자신보다는 현재 자신이 갖게된 정체성을 더 소중히 여기고 있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를 읽고 나서는 한동안 닭고기를 먹지 않았다. 모든 육식을 끊을 자신은 없어 생각해낸 대안이었다. 일 년 정도를 계획했는데 실패. 지금보다 괜찮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책을 읽는다. 귀가 얇고 줏대가 없어서 책을 읽고 감명받으면 저자의 방식을 따라 해본다. 그렇다고 습관을 바꿔 전혀 다른 나가 되지는 못한다. 조금씩 바꿨다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걸 반복하고 있다. 『살리는 일』은 실천의 강요를 받기 보다는 새롭게 알게 된 점이 많은 책이었다.
너구리가 먹을 수 있는 사료도 있다. 사육 곰이라는 게 존재한다. 견주, 주인이라는 단어는 잘못된 말이다. 동물 병원에는 보호자의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꼭 보게 싶게 만드는 책과 영화의 소개. 나 하나도 책임지는 게 버거워서 살아 있는 존재 자체를 들일 생각을 안 한다. 생명에 대한 책임감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안다. 언니네 이발관의 리더 이석원은 그럴거면 동물을 키우지 말자고 했다. 그럴거면에 담겨 있는 우리의 잘못은 따로 안 써도 아시죠?
『살리는 일』은 동물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이의 치열한 기록이다. 글을 쓰는 시간 보다 길에서 떠도는 동물을 구조하는 시간을 더 애틋해 하는 사람이 쓴 책이다. 어렵게 쓰지 않고 효율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단정한 문체로 표현한다. 고양이를 한 번도 쓰다듬어 본 적이 없는 내가 『살리는 일』을 읽었다고 해서 그들에게 먼저 다가갈 순 없지만 자신의 바깥에 온 관심을 두며 살아가는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이의 생각을 따라가는 건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