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는 24시
김초엽 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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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는 24시』에 실린 배명훈의 「수요 곡선의 수호자」를 읽다가 아침부터 울컥했다. 인공지능 로봇 마사로의 말 때문이었다.


"다행이다. 그럼 됐어. 잘 가고 잘 살아.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나야 뭐 공사 재개되면 어떻게든 나갈 수 있겠지. 그림 좀 보다가 전원 내리고 자면 돼. 누가 또 깨우겠지. 중간에 깨어나서 너를 만나 즐거웠어. 나는 그러면 됐으니까 너는 너를 구해."

(배명훈, 「수요 곡선의 수호자」中에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연구소에서 만든 마흔 대의 로봇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마사로는 자신을 깨워준 '나'에게 고마워한다. 작별의 말로 '너는 너를 구'하라고 말해준다. '너는 너를 구해'라는 문장을 읽으며 한참을 생각에 빠졌다. 요즘 내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어떤 힌트 같은 말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한 번 꽂히면 끝을 보는지라 카톡 프로필 문구로 바꿀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전에 일했던 곳에서 누군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은 프로필에 일기, 다짐 같은 문장을 쓰는 사람이 이상하다고 했다.


이제는 만날 일도 없는 사람의 말까지 신경 쓰는 나는 여전히 바보에 쪼다인 것 같다. 대신 블로그 프로필 문구로 바꿨다. 계속 입가에 맴도는 말. '너는 너를 구해.' 『놀이터는 24시』는 '즐거움'이라는 주제로 쓰인 소설 모음집이다. 오랜만에 한 편도 거를 수 없는 소설집을 읽었다. 실린 모든 소설이 좋았다. 감동이었다. 왜 그런지 자세히, 전문적으로 쓰고 싶지만 그럴 능력이 없다. 그저 소설을 읽었을 때 마음이 그렇다는 것만 밝혀둔다.


실종 대행업을 하는 주인공의 이야기 편혜영의 「우리가 가는 곳」은 소설이 끝난 시점에 희망이 남아 있을 거라는 잘못된 추측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초엽의 「글로버리의 봄」은 가짜 즐거움도 즐거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가짜 즐거움이라도 필요한 지금에 생각한다. 「일은 놀이처럼, 놀이는……」에서 장강명은 소설 쓰기의 혹독한 과정을 보여준다. 과거 엠씨스퀘어 광고지를 빙자한 연습장을 보던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공부를 못하는 이유는 엠씨스퀘어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가난한 나는 그렇게 나를 위안했다.


믿고 읽는 김금희의 「첫눈으로」는 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심오하고 철학적인, 건 아니고 먹고사는 건 뭣 같지만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이상한 용기를 준다. 박상영의 「바비의 집」은 단편 영화 같은 구성이라 좋았다. 제니와 평화가 버려진 놀이공원에서 서로를 다독이는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춤추는 건 잊지 마」에서 김중혁은 내가 꼭 가져야 할 시간인 휴식에 대한 아포리즘을 선사한다. 그게 어디든 쉴 수 있는 공간만 있다면 쉬어야 한다고 말해준다.


소설 모음집을 읽으면 모든 소설이 좋다는 느낌을 갖기는 힘들었다. 한 편 정도는 나의 취향과는 맞지 않았다. 『놀이터는 24시』는 달랐다. 모든 소설이 구린 내 취향을 저격했다. 사실 취향이랄 것도 없이 소설의 한 문장이 좋으면 좋네라고 생각하는 정도. 기획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 소설을 모아 세상에 내놓겠지만 마음에 들지 않다고 독자가 느끼면 어쩔 수 없다. 당신과 나의 취향이 다른 것이라고 여기면 된다. 우울해하거나 기분 나빠하지 말자.


단순해 보이지만 단순하지 않은 성격을 가지고 있어 요즘의 상황을 돌파까지는 아니고 사고 없이 지나가고 싶어 책을 열심히(언제는 열심히 안 읽었나.) 읽고 있다. 사람도 아니면서 사람 보다 더 세련되고 위트 있고 공감 능력까지 출중한 로봇 마사로의 한 마디. 버려진 놀이공원에서 역시 버려진 것 같은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조카와 고모가 나누는 대화. 도망칠 수 있는 것도 기회라고 너무 자책하지는 말라고 말해주는 것 같은 소설의 결말. 때문에 이 밤을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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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뒷모습 안규철의 내 이야기로 그린 그림 2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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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 가서 멘탈 무너지지 않으려고 책 읽었다. 안규철의 『사물의 뒷모습』. 아침에 일어나서 책상에 앉아. 창문 열어 놓고 새소리를 배경음 삼아 천천히 읽어 나갔다. 집중력이 꽝이라 한 시간 읽고 밥 먹었다. 밥 먹었으니 누웠다. 집 안에서만 생활하는데도 체력이 달리는 건 기분 탓인가. 청소, 설거지만 했을 뿐인데 힘이 없다. 자기 전 역시 누워서 『사물의 뒷모습』을 읽었다. 떨린다. 왜 떨릴까. 또 이상한 소리 들을까 봐. 그 이상한 소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까 봐.


그림이 있고 글이 있다. 단순한 책이다. '종이에 연필'로 그린 그림은 담담한 내용의 에세이와 잘 어울린다. 그림을 평가하는 능력은 없으니 심심한 그림체가 좋다는 말 밖에는. 글은 시와 산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요즘은 그렇다. 힘이 될만한 글을 찾아 읽으려고 한다. 힘이 되지 않을 글이어도 힘이 되지 않을까 하면서 읽는다. 그렇게 힘을 찾고 있다. 애써 힘을 찾으며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책은 소중한 위안이다.


『사물의 뒷모습』은 우리가 볼 수 없는 달의 뒷면처럼 사물이 가진 이면을 찾아내 들려준다. 조용한 산사에 들어가서 읽으면 좋을 책이다. 그림 한 번 보고 생각에 잠겼다가 느리게 글을 읽고 나서 생각에 빠진다.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감정을 곱씹게 된다. 내일은. 내일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진 않는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바보 같은 일을 하지 않으려고 책을 읽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부담감에 책을 마저 다 읽지는 못했다. 단체 면접이라는 걸 처음 봤다. 그냥 개 망했다는 후기. 차가 없는 뚜벅이는 걸어서 집으로 올라왔다. 와. 높은 우리 집. 땀 좀 식히려고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지나가는 일본인 아줌마에게 전화번호 따였다. 무슨 실천 모임이라는데 엉겁결에 주소와 번호를 써주고 말았다. 왜 그랬나. 바보. 거절 좀 하지. 집에 와서 낮잠 자고 일어나 『사물의 뒷모습』을 진짜 다 읽었다.


책 리뷰 쓰는데 전문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고 책 읽은 과정만 나열하고 있다. 멘탈 관리하려고 읽었지만 어김없이 멘탈은 깨졌다. 복구하려고 다시 책 읽고. 역시나 드러누워서. 면접이란 무엇일까. 사람의 앞면만을 보는 시간 아닐까. 이력서에는 적히지 않은 그이의 뒷면을 보는 것 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적힌 내용이라도 제대로 물어봐 주기를. 그러지 않아서 세계의 뒷모습을 염탐하는 이의 치열한 기록을 읽는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봐 주는 건 책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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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숨
조해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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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할수록 최선으로 밀려나는 삶에서 사랑은 구원이 될 수 없었음을 『환한 숨』은 보여준다. 단지 사랑의 기억만을 가지고 남은 내일을 살아가라고 말한다.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한 순간을 복기하며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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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럴
이장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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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알고 싶지 않겠지만 근황 하나 투척한다. 단기 알바 하나를 끝냈고 계속 서류를 내고 있다. 오늘은 처음으로 면접 연락을 받았다. 열람만 하고 연락이 오지 않아서 반쯤 자포자기하고 있을 때였다. 오죽했으면 '오늘의 운세'를 매일 들여다보고 있었을까. 아무 상황에나 대입할 수 있는 뻔한 말이지만 긍정적인 문장이면 그런대로 기분이 좋아진다. 가만있자. 오늘은 '허풍에 조심하세요'라네요.


자격증 공부할 때도 그랬지만 안달복달, 애면글면, 반드시라는 마음으로 하면 안 되더라. 여유를 가진 사람이 되어보자. 가지겠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겠지만. 적어도 급한 마음으로 일을 망치려 들지 말자. 여기까지 써 놓고 보니 오늘의 운세에 심취한 사람의 문장력이다. 책 많이 읽고 꽂히는 음악이 있으면 그것만 듣는 시간이 언제 다시 올까. 시간을 가진 사람이 부자라고.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내가 직업이 없지 가오가 없냐. 있을 때 누리자. 시간.


이장욱의 장편 소설 『캐럴』을 읽는 동안 눈이 내리는 겨울이 그리웠다. 따뜻한 남쪽 지방에 살고 있는지라 겨울이 되어도 눈 구경 하기 힘들다. 간혹 폭설이 내릴 때가 있는데 그럴 땐 기대를 하는 시간이었다. 내일 버스가 끊겨 일을 나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캐럴』을 읽고 줄거리 요약을 해보려고 했는데 그러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줄거리를 아는 게 무의미한 소설이다.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읽는다. 다 읽고 나서는 어떤 마음이 들지 차분히 생각해 보는 것으로 의미가 있는 소설이다, 『캐럴』은.


1999년을 기억하는지. 기억한다면 당신은 나와 동시대를 산 사람. 세기말 감성에 젖어 모든 걸 비관적으로만 보던 청소년이었다. 나도 너도 세상도 다 싫은 겁은 많아서 비행청소년은 못 되고 말 안 듣는 아이 자칭 문학소녀였더랬다. 지금도 생각하면 식겁한다. 그때 문학을 알지 못했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풀렸을까. 풀리지도 못한 채 접혀서 찌그러져 있었겠지. 아니 더 괜찮은 쪽으로 풀렸을까. 오랜만에 서점에 가서 자격증 서적 코너에서 잠시 후회를 하긴 했다. 인문계를 가지 말 걸. (구인 공고를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문송합니다.)


『캐럴』은 1999년을 사는 도현도와 2019년을 사는 윤호연이 시간 차이를 극복하고 만나면서 시작된다. 도현도는 람페라는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 대학 수업 때 선우를 만나 호감을 가지지만 그녀와 헤어진다. 어느 날 아침 도현도는 채권 추심인의 방문을 받는다. 그도 모르는 빚이 있다는 거다. 최악의 아침인 게 람페가 죽었다. 끈질긴 채권 추심인의 방문과 전화를 받고 도현도는 지하 7층의 사무실로 불려간다. 그곳에서 2019년을 사는 윤호연과 연결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1999년의 시간이 무척이나 생각났고(그래서 책장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고민도 아닌 고민을 잔뜩 이고 학교에 다니는 그 시절의 나의 모습이 갑자기 소환돼서) 2019년이 그리워졌다. 마스크 없이도 자유롭게 돌아다녔던. 도현도는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선우는 잠을 잘 수 없는 사람이었다. 불면이 아닌 비면으로 살아간다. 소설은 친절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전부 들려주지 않는다. 그들의 미래는 알려주지 않은 채 과거와 현재를 이어간다.


한동안 낮과 밤이 바뀐 채 생활했다. 어떤 날은 밤에 깨어 있는 게 미치도록 좋았고 어떤 날은 나 자신이 싫어졌다. 이중적인 생각이 들게 만드는 밤의 시간. 내일이라는 미래는 창밖으로 다가와 있는데 현재에 갇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캐럴』은 후회와 회환으로 가득한 소설이다. 미래를 안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건 없다. 누군가의 죽음을 예고해 주는 일 정도. 그래도 죽음은 닥친다. 이틀 후 나는 면접에서 무슨 말을 하게 될까. 궁금한 건 그 정도. 과거와 현재의 기억으로 살아간다. 미래는 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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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1-23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살리는 일 - 동물권 에세이
박소영 지음 / 무제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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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문학과 영화를 접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우리는 '생득'을 벗어나기 어렵다. 인종, 성별, 성적 지향 등 타고난 조건이 사고를 지배한다. 내 입장과 처지를 벗어나 다른 이의 삶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문학과 영화는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딛고 선 자리를 벗어나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것. 불완전하게나마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 책과 영화를 통해 우리는 다시 태어나지 않고도 타인의 존재를 감각할 수 있다.

(『살리는 일』中에서, 박소영)


이왕 이렇게 된 거 책이나 읽어보자는 심사다. 뭐, 언제는 책 안 읽고 살았나. 그게 아니라 본격적으로 읽어 보자는 거. 언제는 본격적으로 안 읽고 살았나.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유일한 취미이자 오락거리가 '독서'면서 왜 이런 말을 할까. 상황을 바꿔 보자는 뜻이다. 대학교에서 보낸 시간을 제외하곤 일하면서 일 때문에 걱정하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더랬다. 지나고 나니 대학 시절은 좋았네. 마음대로 책을 읽고 책 많이 읽었다고 칭찬도 들었던 유일한 시기였다.


회피하고 싶어서 백수로 보내는 기간을 세어 보질 않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달력을 보니 7개월이 되어간다. 겁나 빠르다, 빨라. 첫 달에는 학원 다니고 자격증 따서 바로 취직해야지 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우리네 인생. 너무 떨려서 시험 한 번 망하고 다시 본 시험에서 합격했다. 기쁠 줄 알았는데 막상 호들갑을 떨 만큼 기쁘지 않았다. 매일 아침 메일함에 '담당자가 이메일 입사지원서를 열람했습니다.'라는 제목의 메일만 보기 때문일지도.


마음이란 게 무겁고 넓어서 다 비울 순 없어 조금씩 덜어내고 있다, 부정적인 마음의 일부를. 어떻게? 잘하는 거 하면서, 책 읽는 거. 일단 살고 봐야지. 박소영의 『살리는 일』은 제목이 주는 위안 때문에 읽었다. '동물권 에세이'라고 분류되어 있다. 책에는 동물, 인간을 나누지 않고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한 따뜻함이 담겨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살리는 일이 된다. 집 앞에 생긴 편의점 한 쪽에는 고양이 사료와 물이 담긴 그릇이 놓여 있다. 편의점 주인이 놓아둔 듯했다.


그걸 보고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는 베란다에 마련된 캣타워에 앉아 있는 고양이 세 마리와 만난다. 이름을 몰라 '행고'라고 부른다. 행운의 고양이라는 뜻의 줄임말이다. 매일 두 번씩 만나니까 너희들을 보면 행운이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붙였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손을 흔든다. 안녕, 행고. 이제 집으로 들어와 씻고 누워 있으면 화장실 환풍기를 통해 고양이 울음소리를 듣는다. 윗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의 소리다. 쟤는 꼭 화장실에서 운다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들 정도로 화장실에서 존재감을 발휘한다.


이것이 나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의 고양이 이야기다. 하나 더 있다. 어렸을 때 문 열어 놓고 외출했는데 돌아오니 고양이들이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니 후다닥 달려 나갔다. 또 있는데 이제 그만. 『살리는 일』에 대해 써야지. 저자 박소영은 캣맘이다. 동생과 함께 고양이 급식소에 사료와 물을 놓아 준다. 아픈 애들이 있으면 구조 한다. 동물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전과 후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고백한다. 과거의 자신보다는 현재 자신이 갖게된 정체성을 더 소중히 여기고 있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를 읽고 나서는 한동안 닭고기를 먹지 않았다. 모든 육식을 끊을 자신은 없어 생각해낸 대안이었다. 일 년 정도를 계획했는데 실패. 지금보다 괜찮은 사람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책을 읽는다. 귀가 얇고 줏대가 없어서 책을 읽고 감명받으면 저자의 방식을 따라 해본다. 그렇다고 습관을 바꿔 전혀 다른 나가 되지는 못한다. 조금씩 바꿨다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걸 반복하고 있다. 『살리는 일』은 실천의 강요를 받기 보다는 새롭게 알게 된 점이 많은 책이었다.


너구리가 먹을 수 있는 사료도 있다. 사육 곰이라는 게 존재한다. 견주, 주인이라는 단어는 잘못된 말이다. 동물 병원에는 보호자의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꼭 보게 싶게 만드는 책과 영화의 소개. 나 하나도 책임지는 게 버거워서 살아 있는 존재 자체를 들일 생각을 안 한다. 생명에 대한 책임감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안다. 언니네 이발관의 리더 이석원은 그럴거면 동물을 키우지 말자고 했다. 그럴거면에 담겨 있는 우리의 잘못은 따로 안 써도 아시죠?


『살리는 일』은 동물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이의 치열한 기록이다. 글을 쓰는 시간 보다 길에서 떠도는 동물을 구조하는 시간을 더 애틋해 하는 사람이 쓴 책이다. 어렵게 쓰지 않고 효율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단정한 문체로 표현한다. 고양이를 한 번도 쓰다듬어 본 적이 없는 내가 『살리는 일』을 읽었다고 해서 그들에게 먼저 다가갈 순 없지만 자신의 바깥에 온 관심을 두며 살아가는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이의 생각을 따라가는 건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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