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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2월
평점 :
정말 좋은 것은 나누고 싶다. 얼마 전 정말 좋아하는 기타리스트의 공연을 보고 나서 직접 그의 사인 시디를 받게 되었다. 정말 기분이 좋았지만, 그날, 지하철에 그 사인 시디를 두고 내려버렸다.
정말, 안타까울만 한데, 그 날은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공연을 보고 나서의 감흥과 감동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마음 한편으로는, 그 시디가 그렇게 버려지지 않고, 누군가 역시 음악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이 발견하였으면 하는 마음 마져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좋은 '어떤 것'을 마주했을 때,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닐까?
우연치 않게, 그런 기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근래 내가 본 책 중에 단연 추천하고 싶은 것이 바로 [철학이 필요한 시간] 이다.
'진정한 진리는 평범함 속에 있다'고 했다. 책을 읽으면서, 프롤로그에서 말하는 말이, 평범하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지만, 문득 새롭게 떠오른 '어떤 생각'인 것처럼,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와 함께 앞으로 넘겨질 페이지들에 대한 어렴풋한 기대를 가져 보았다.
지금까지 저는 숨낳은 유리병 편지를 받았습니다. 발신자는 스피노자, 장자, 나가르주나,원효 등과 같은 철학자였습니다. 매번 편지를 받아 펼쳐볼 때마다 저의 고독과 외로움은 겸감되었을 뿐만 아니라 저는 인간적으로 성장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편지들을 통해 제 사유와 삶이 외롭지만은 않다는 위로를 받았으며, 동시에 제 속내를 표현하는 관점이나 기법도 아울러 배울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흔히, 미인의 기준을 두고 설왕설레하고는 한다. 그리고는, 가장 아름다운 눈, 가장 아름다운 코, 가장 아름다운 입, 이처럼 가장 아름다운 것들만 모아 놓은 얼굴을 예상한 것 만큼 아름답지 못하다더라, 라고 이야기하며, 웃곤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만약 그 대상이 미인의 기준이 아니라, 책이라면 어떨까?
[철학이 필요한 시간]은 굳이 따진다면, 가장 많이 회자되고, 익히 알려진 유명한 학자들, 그리고 그들의 수많은 저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저서들 속에서, 가장 배울만한 명 구절들만을 모아 수록하였다. 그것도, 48 가지나... ...
책을 읽어 나가면서 한 가지 놀란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지금까지, 이와 비슷한 책을 수없이 보아왔다. 하지만 대개의 책들은 한정된 지면 속에 너무나 많은 것을 담으려 한 때문인지ㅏ. 대개의 경우에, 그 내용이 부실하다거나, 또는 아느 한 이야기에 치중될 뿐,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그저 페이지를 채워넣기 위한 용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책들은 시작이 거창할 뿐 그 알맹이는 비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에 비해 [철학이 필요한 시간]은 알알이 실한 알갱이가 잘 박혀 있는 맛있는 시골장터의 옥수수같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책장을 넘기는 손을 멈칫 하게 하며, 보는 이를 잡아 끄는 이야기들이, 조금의 쉼도 없이 이어져 있고, 그 이야기들은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게, 적당히 배합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맛있는 재료들로 잘 버무려진 맛있는 비빔밥을 먹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 대한 서평을 쓰기에 앞서 망설여졌다. 이처럼 풍부한 내용의 책을 짧은 글로 다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것이 첫 번째였고, 글을 쓰면서, 전혀 엉뚜한 이야기를 하여, 의도와는 다르게 나의 뜻이 전달될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한 것이 그 두 번째였다. 그래도 보다 분명한 것은, 이 책을 통해 이처럼 무엇이라도, 한 가지 사유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며, 아마도 이 책을 읽어 나가게 되는 사람이라면, 이처럼 사유하게 되는 즐거움을 보다 자주 맛볼 수 있으리라...
또한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는 배움이 가득하다. 혹자는 인문학, 철학 서적이니 '배울 것이 가득하다'는 말은 너무 진부한 표현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이러한 배움이 강요된 것이 아닌 스스로 즐기는 그런 배움이라면 과연 그것을 진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수단이면서 목적일 때 우리는 기쁨으로 충만한 현재를 살 수 있는 반면 자신의 행동이 무엇인가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고단함으로 충만한 현재를 견디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재'가 두 가지 의미로, 혹은 두 가지 가치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놀이에서 분명해지는 것처럼 그 자체로 향유되고 긍정되는 현재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의 경우처럼 미래를 위해 소비되어야 하고 견뎌애 하는 현재이다. |
위 구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행동이 수단이면서 목적이 되기 위한 다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나는 책을 읽는 동안,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 할 정도로 책 속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문득문득 책속에서 새로운 지식을 발견할 때보다,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과 일치되는 부분이나, 혹은 내가 가진 생각을 바로 잡아주거나 늘려 주는 그런 내용에 자연스럽게 책 속의 내용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마도, 행동이 수단이면서 목적이 된다는 것은 이러한 기분과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만일 내가 타자에 의해서 사랑을 받아야 한다면, 나는 사랑받는 자로 자유로이 선택되어야 한다. 알다시피 사랑과 관련된 통상적인 용법에 따르면 '사랑받는 자'는 '선택된 사람'이라고 불리낟. 그러나 이 선택은 상대적이거나 우발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타자가 자기를 선택한 것이 '다른 애인들 중에서'라고 생각하는 경우, 사랑에 빠진 사람은 화가 나고, 그리고 자기가 값싼 것 처럼 느낀다... ...(중략)... ... 사실 사랑에 빠진 자가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점이다. |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항상 누군가로 부터 사랑받기를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한 역설적으로, 우리는 현대 사회를 살면서 보다 많은 선택의 기회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어느 시대 보다 능동적이며, 역동적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와 정 반대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위 구절은 책을 읽으며, 몇 번이고 다시 나를 되돌아 보게 만든, 그런 구절이다. 과연, 난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되어진 수동적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닌지, 오히려 그런 삶이 나로 하여금, 타성에 젖게 만들어, 내가 스스로 선택한 길을 가고 있다는 자만에 빠져든 것은 아닌지,,, 그리고 어느새,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어쩌면 이런 사랑이라는 감정은 모든 것에 공유될 수도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준다는 것은, 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모두 내어주는 것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타자에 의해서 사랑을 받아야 한다면, 나는 사랑받는 자로 자유로이 선택되어야...' 하듯이... .... 강요하는 것이 아닌, 읽는이가 자유로이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배려가 느껴지는 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가장 큰 장점이며, 이 생각은, 앞으로도, 이외의 경우에도, 변함이 없으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