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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수학 범죄 수학 시리즈 1
리스 하스아우트 지음, 오혜정 옮김, 남호영 감수 / Gbrain(지브레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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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필답이란 것이 있다. 말 그대로 글로 써서 대답한다는 뜻으로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같은 한자권에 속하는 일본, 중국, 우리나라 같은 경우 필답을 통하여 소통을 하기도 하였다. 재밌는 것이 전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필답이 있다. 그것이 바로 아라비아 숫자이다. 

얼마전 한 가지 중대한 발표가 국내 기업들과 회계법인을 긴장상태로 데려간 적이 있다. 바로 국제기준회계(IFRS) 적용이 바로 그것이다. 나 역시 과거 회사에서 이것 때문에 머리 아팠던 기억이 있다. 재밌는 것은 이 회계란 것도 만국공통어란 것이다. 언어가 달라도 그 기업의 재무제표와 손익계산서를 들여다 보면 기업의 경영상태를 한눈에 알 수있다. 

수학은 모든 것에 통하고 있다. 내가 만지고 있는 키보드가 그렇고, 내가 보고 있는 모니터가 그렇다. 내가 숨쉬고 마시는 공기의 분자식도 수학을 통해 만들어 졌다. 재밌는 것은 내가 적고 있는 한글 또한 수학적 이해를 통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수학을 다 잘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수학을 잘 하면 세상을 이해하는 힘이 생기게 되고, 그만큼 세상에서 자신을 펼쳐 보일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가질 수 있다. 또한 수학적 이해는 논리력 등 다른 여타 학문을 이해하는데도 크게 도움이 된다. 

소설은 과연 소설가들만 써야 하는가? 내 생각은 절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비소설가들이 소설의 영역안으로 들어올 때 글의 위력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저명한 과학자가 자신의 연구를 토대로한 과학소설을 쓴다면? 고대 역사학자가 고대 역사의 미스테리를 펼쳐나가는 소설을 쓴다면? 유명한 의학박사가 자신의 수술경험을 바탕으로 한 의학소설을 쓴다면? 상상만 해도 굉장한 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연구와 일 때문에 바쁘다면, 그렇다면, 굳이 소설을 쓰지 않더라도 적어도 그 내용을 글로 남겨서 일반 대중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해준다면 어떨까? 

그들이 가진 재능은 두말할 것도 없이 대단한 것이고, 그 능력을 토대로 여러가지 연구를 하고, 기술을 직접 펼치며 활약하는 것도 좋지만, 난 그들의 능력 자체를 일종의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기술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공유할 수 있다면 더 좋은 일이지 않을까? 알 필요가 없다고 해서 모르고 살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들의 글을 읽고 어떤 청소년에게 한 가지의 영감을 줄 수 있다면 그로 좋은 것이며, 단지 그들이 펼친 고매하고 소중한 기록과 기술이 일부에게 한정되어 보여지는 것 보다 후대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분명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한계가 있겠지만 말이다.  

수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범죄수학이란 책에 별 다섯개를 주고 시작하고 싶다.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학교 공부에 질려버린 아이들에게 이러한 책은 새로운 돌파구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현상을 타파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이 경우가 첫번째인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생각해 보니 과거에도 게임북을 통해서 비슷한 책을 본적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추리소설이 아닌 추리퀴즈였던 것 같다.그리고 책의 소개에서도 나와 있듯이 수학을 통해 범죄를 풀어 가는 Numbers라는 드라마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이러한 시도는 자꾸 계속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반복되어야 걔중에 정말 소중한 옥석이 나올 수 있는 것이고, 정말 그렇게 된다면 그것을 통해 많은 독자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줄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범죄수학(Crimes and Mathdemeanors) 은 두 가지 관점에서 쓰여졌다. 첫째, 수학을 좋아하지만 단순히 앉아서 수학책을 읽고 문제집으로 공부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 청소년을 위한 책이다. 수학이 암기과목이라고 말하면 요즘에는 애들도 웃을 것이다. 수학이 논리 게임이란 것은 요즘에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수학은 몸으로 배우는 것이다. 수학을 공부한다는 말을 바꾸면 수학을 체득한다로 쓸수도 있을 것이다. 굉장히 어려운 수학문제가 하나 있다. 이것을 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그 문제에 부딪히고 느끼는 것이다. 문제를 푸는 과정은 상관없다. 그 문제를 어떻게 풀었느냐가 중요하며, 그 과정을 스스로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정해진 풀이 과정을 쫓아서 암기하는 것, 그리고 정해진 공식으로 문제를 푸는 것은 부차적인 해결방법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단순히 앉아서 수학책을 푸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 학생들이라면, 범죄수학을 읽을만 하다. 

 

둘째, 비논리적인 면을 수학을 통해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책이다. 저자는 넘버스라는 드라마를 보며 생각과 고민을 많이 한 것 같다. 그리고 자신 처럼 그 드라마를 보았으며 수학을 좋아하는 친구들이라면 그 드라마에서 보여주지 않은 그 이면의 여러 수학에 대한 풀이 과정을 궁금해 할 것이라고 생각한듯 하다. 이미 책을 내고 여러 가지 상을 탈 정도이지만 역시나 고등학생 다운 바람직한 생각이다. 저자는 모범생처럼 착한듯...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중점은 바로 그 풀이 과정을 잘 보여주고 설명하는데 있다. 아마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공식으로 틀에 짜여진 문제만 풀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통해 간단한 수학 공식으로 별난 사건을 풀어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은 수학에 대해 새로운 재미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어떤 사건은 그 과정이 너무나 쉽고 간단해서 마치 마술을 보는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학이 부리는 기교라고 할 수 있겠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어떨 때는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수학, 우리 일상과 떨어져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범죄수학이 수학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는데 일조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이러한 시도에 영감을 받아, 혹은 이와 상관없는 이유라도 이런 책이 자꾸만 나왔으면 한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수학에 대해 선천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 같다. 마치 포유류가 학습에 의하지 않고도 파충류에게 공포를 느끼는 것처럼... 하지만 그렇지 않다. 수학에 대한 거부감은 다분히 후천적이며 경험적 학습에 의한 것이다. 문제점은 이러한 인식이 사회전체에 널리 퍼져있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의 기저에서 우리가 알아 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 청소년들이 그에 점령 당해 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서운 것은 이에 대해 딱히 백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처럼 처방전 같은 범죄수학 같은 책이 나오고 있는것은 고무적이다. 이번에 처방전을 받아 약을 제조해야 할 사람은 우리독자들이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먹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아무리 좋은 글이라도 그것을 바르게 읽고 이해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일단 이 글을 읽은 청소년이 있다면, 수학이란 글자가 들어가 있는 제목에 닭살부터 돋지 말고,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그리고 읽으면서 주의할 것이 있다. 첫째는 천천히 읽으란 것이고, 둘째는 섣불리 책장을 넘기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저자는 책의 에피소드가 지나치게 분할되어 있어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을 다하지 못했고 내용이 부실해진 면이 있다고 하지만 덕분에 한번에 책을 한번에 다 읽어야 하는 부담이 없다. 책을 읽는 이가 읽고 싶은 부분 부터 읽어 나가되 부디 천천히 나름의 답을 얻어내는 과정까지 가보길 권하고 싶다. 일단 내용자체로는 그리 재밌는 책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억지로 책을 넘겨보라고 하지 않는 이상 이 책을 재미를 느끼기 위해 급히 책장을 넘기지 않았으면 한다, 오히려 그렇게 한다면 이 책을 끝까지 보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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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운 건축>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자연스러운 건축
쿠마 켄고 지음, 임태희 옮김 / 안그라픽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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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는 콘크리트의 시대였습니다"
서문 중 작가


그리고 20세기는 쓸쓸한 시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여 건축=콘크리트+화장 이라고 덧붙인다. 아마도 20세기는 건축 이외의 부분에도 비슷한 이해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어쩌면 범 시대적인 조류의 일관된 모습이 바로 쓸쓸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과연 이 책에서는 쓸쓸한 시대를 어떻게 해석해 내고 다가오는 시대를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지를 건축학적인 관점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건축가들에게는 건축학적인 관점에서의 나름의 해결책을 그리고 그 외의 방면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나름의 한 가지 단서를 던져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연관은 가장 작은 장소에, 개인이라고 하는 가장 작은 단위에 귀속한다." 자연은 일반론이 아니다. 어떠한 나라의 자연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자연은 어떤 특정한 장소에 구체적인 모습으로만 존재한다. 특정한 장소와 장소 사이의 교류를 통해 건축은 앞으로 전진해 간다.

뒤에 나올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실마리가 되는 이야기인 것 같다. 자연이라고 한다면 지금까지는 일반론적인 접근이 많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자연에 대한 일반론적 접근은 필요없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다만 실제로 우리가 자연을 대할 때면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고, 최전선의 논의들은 모두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사실 자연에 대해서 어떤 논의는 통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에 대한 일종의 실험의 정도이다. 자연을 마주 하고 있을 때는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대로,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현장에서 조차 이런 이야기를 망각할 때도 있는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어쩌면 이런 면에서 좀 더 주의를 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전자보다 후자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한다. 현장에서 지나치게 자연과 마주 대하고 궁구할 때면 이런 사실을 잊어버리고 현상 그 하나에 초점이 맞추어져 버릴 때가 있는데, 그럴 때 ’과연’ 이처럼 자연에 대해 다시 상기한다면 어떤 실증적인 효과가 있을지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태양과 입자와 수용자, 이 세 가지가 ’관계성’에 의해 무지개로 출현한다.

자연이란 것은 정적이지만 그 안에 동적이며 항구적인 변화를 내포하고 있는 靜이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건축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은 한 두 문장으로 끝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 수용자가 느낄 수 있는 파동은 변화무쌍하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건축이 안겨다 주는 하나의 이야기 거리이다. 공간 안에서 새로운 파동 하나하나가 수용자만의 이야기화 한다.

사회의 Operating system 으로서의 건축

아기돼지 삼형제의 이야기가 참 흥미롭다. 아기돼지 삼형제의 건축 방식이 곧 그들의 본질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OS로서의 건축에 대한 논의가 한편으로 진부하다고 말하면서도 이어지는 설명이 흥미롭다.

투시도법 자체는 상징적이기 때문에 건축에서도 ’그 지역의 특수성과 시간을 압축해 놓은 상징적 기념물인 건축물을 요구하게 된다.

투시도법 자체는 2차원인 그림에 3차원적인 공간을 그려내기 위해서 만들어 졌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연과 그림에 대한 경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즉 2차원적인 공간에 3차원적인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넣기 위해 오히려 자연에 대한 정의를 통해 상징적인 공간으로서의 건축이 만들어 진다.




히로시게의 미술에서는 비는 자주 직선으로 표현된다. 거기에는 자연과 인공과의 경계에 대한 양자를 연속한 것으로 간주하는 자연관을 엿볼 수 있다.

자연에서의 비는 직선으로 내리는 법이 없다. 장대비가 쭉쭉 내린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바람에 따라 그 방향은 자기마음이다. 그렇다면, 회화속의 비는 어떨까?, 건축은 어떠해야 할까? 건축이든 미술이든 그것 자체가 자연이 될 수 있을까? 두 가지를 구분짓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가지 의문이 동시에 떠오르게 만든다.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연적인 것은 자연을 모사하는 것에 넘어서 어떤 한 지점에서 융합을 이루어야 하는 것인지도... ... 이처럼 한꺼풀씩 고정관념을 벗고 사물을 볼 수 있을까?





진화의 방향을 거꾸로 돌리고 싶다는 것이 나의 제안이었다.
땅 속으로 집어 넣은 전망대, 기로잔 에서


과거의 건축은 지형에 알맞게 건축된 것이었다. 여기서 ’알맞게’라는 표현이 참 애매하다. 예를 들어 동굴집 같은 경우에, 자연 동굴을 이용한 경우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는 앞에서 나오는 자연과 인공의 경계 문제와도 한 축을 잇는다. 제방시설을 하면서 자연적인 계산을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수십년내 혹은 수백년 내의 예측은 가능하지만, 그 이상의 예측은 기록도 없지만 예측 자체가 어렵다. 하지만 기술은 이를 한 순간에 해결해낸다. 하지만 이 경우는 인공이 자연을 침범한 경우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건축기술의 진화를 역으로 돌리고 싶다는 것은 다시 되짚어 보면 건축기술 발전의 새로운 지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는 이미 그리 새롭지 않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새롭게 풀어 내고, 그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제나 재미있다.

자연스러운 건축의 의뢰인들에 대해서는 보통 건축의 클라이언트에 대한 감사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의 큰 감사를 전하지 않으면 안된다.

재밌다. 그만큼 자연스러운 건축이란 어렵다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뉴욕에 워터블록을 이용한 작품을 출품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서 석유제품을 이용한 소재를 사용한 것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면 항상 움찔하곤 한다고 한다. 자연스러운 건축도 이와 같은 것 같다, 100% 확신을 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럽지 못할 것이다. 아마, 그 때문에 이와 같은 건축을 허락한 의뢰인들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같다.

자연이란 인간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도 그 일부이기 때문이다. 재밌는 것은 같은 이야기라도 보고, 듣는 사람에 따라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때론 슬프기도 하고, 때론 웃음을 주기도 한다. 앞으로는 사람들이 더 많이 웃을 수 있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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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가면의 제국 - 오리엔탈리즘, 서구 중심의 역사를 넘어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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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음 하얀 가면의 제국을 손에 들었을 때 박노자라는 러시아인이 한국의 역사를 어떻게 그렸을지 많은 호기심이 생겼다. 서양인의 눈으로 본 아시아, 그리고 한국은 어떤 모습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책장을 넘겼다. 하지만 박노자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답게 우리가 보지 못한 진실을 이야기 해주는 듯하다. 단순히 인종적 의미에서의 서양인의 눈으로 그린 아시아와 한국의 모습이었다면 박노자의 책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이것이 박노자의 책을 읽으며 첫 번째로 느낀 것이었다.
 
 사실 서구 문명에 대해 무조건 적으로 우러러 보는 인식에 대한 비판이 시작된 것은 오래 전부터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은 누구나 들어보았을 것이다. 비판적 문화수용이라는 말을 들은 지도 수년 전인 것 같다. 이제는 누구나 나이키나 아디다스 등의 브랜드를 달고 나오는 옷의 대부분이 인도나 동남아시아 등 3세계의 가난한 아이들이 착취당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매운동을 한다거나 목소리 높여 착취하는 쪽을 비판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일까? 그런 당연한 인식과 행동이 특별한 케이스로 뉴스에서 대접을 받고 있다. 또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걸프전쟁 등 중동 관련 분쟁이 미국의 이권다툼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안다고 달라진 것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이 책을 읽으며 우리의 인식이 아직도 서구 중심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계속 읽어나가면서 그러한 인식의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책을 통해 미국은 그 어떤 정권보다 강대하고 방대한 선전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사실인 것처럼 알리고 진실을 은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놀라우리만큼 성공적이었다. 가장 주목을 한 것은 노벨상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나라가 갖는 콤플렉스 중 대표적인 것이 노벨상을 한 명도 수상하지 못한 것이다. 이웃나라 일본과도 많이 비교되면서 약점처럼 꼬리를 잡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을 보면 사람들이 노벨상에 대한 권위를 아무 생각없이 떠받드는 이유가 바로 미국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나 미국의 선전에 대한 영향력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난 세계 최고의 권위를 갖는 상에 대해서 맹목적으로 믿어왔다. 아카데미상, 노벨상, 그래미상, 퓰리처상 등 그 이유도 생각하지 않고 최고로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런 인식이 잘못된 것은 아닐 지라도 자신이 믿고 따르는 대상에 대해서 왜 그런지 정도는 명백하게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양심적인 일본학자 또는 지한파 외국인을 보면 무조건 반갑고 긍정적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몇 가지 오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교가 서양에서 유행하는 것에 대한 좀더 사실적인 해석을 알 수 있었다. 최근에 우리 나라에도  불법수행을 하기 위해 찾아오는 외국인들도 많고 벽안의 스님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심지어는 벽안의 스님이 불교TV에 나와 우리말로 설법을 하기도 한다. 신기하기도 하고 불교라는 우리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외국인으로서 대단히 반갑고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교의 서양에서의 대중화를 무조건 적으로 반길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불교 변질과 변질된 불교의 역 전파의 우려까지도 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물론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학술과 종교가 있을 수 없다는 박노자의 의견은 역사적인 전례들로 증명되었지만 상당수가 선을 정신분석이나 요가와 같은 범주의 개인 정신능력 개발기술 쯤으로 소비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정치적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의외였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잘못된 인식과 오해의 가면을 벗어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면을 벗기 위해서는 매체를 통해서 전파되는 사실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할 것이다. 매체를 통해 전파되는 사실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사실이 생겨난 연유와 배경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대해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역사적 진실을 바로보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서구중심주의 사상을 깨뜨릴 필요가 있다.

얼마전 TV를 통해 남아프리카의 경우 전문 간호인력의 해외 유출로 인해 자국 병원에 인력이 없어 중환자들을 수용할 수 없다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아마도 이러한 인재유출은 새로운 형태의 억압이나 착취가 아닐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해외 취업 또는 어학연수를 목적으로 외국으로 나가고 있다. 과연 해외로 가서 큰 돈을 써가며 얻어 돌아오는 것이 무엇일까? 물론 더욱 큰 가치를 가지고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과연 경제적인 크기로만 생각해야 할까? 그런 식의 논리라면 잘 사는 서구는 무조건 옳다는 논리와 같지 않을까? 그런 맹목적인 인식하에서 이루어진 판단과 행동이라면 당연히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지켜보고 개선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책에 나와있는 내용 중 알고 있던 내용도 있었다. 처음 박노자의 글을 읽는 입장에서 너무 완곡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사실이 드문 요즘 나머지 절반의 새로운 사실들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무조건 박노자의 의견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가 제시한 여러 역사적 근거와 사실이 있지만 그의 생각대로 라면 이 책의 내용도 어느 정도 비판적인 시각아래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비판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가면을 벗는 것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사실을 받아 들이며 자신의 의견과 행동에 맞는 생각의 뿌리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 역사를 바라 보았을 때 좀 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하얀가면을 벗자”는 박노자의 말에서 “하얀”이라는 말을 빼고 “가면을 벗자”고 말하고 싶다. 하얀 가면을 벗고 나서 나타날지 모르는 또 다른 가면을 예방하기 위해서 라도 그리고 우리 사회에는 하얀 가면이 아니라도 충분히 사람들을 맹목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갈 가면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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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서 찾은 서른의 성공 마흔의 지혜
김원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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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이란 무엇일까? [자신의 가치관을 정립해서 성공 가능성을 확실히 다지는 것]이라고 책은 성공을 정의하여 물질적 성취라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라고 하고 있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성공이란 것에는 필연적으로 물질적 부가 따르게 된다. 그리고 현대의 성공에는 어찌되었든 개인의 능력+알파의 그 무엇이 필요하다. 이처럼 과거에서 말하는 성공과 지금의 그것은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고전을 그대로 인용한다면 의미가 없을 것이고 나름의 재해석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일까? [자신의 주관을 확고히 가지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위해 남과 다른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남과 다른 시야를 확보하는 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남을 이해시키는 호소력을 지닌 주관이다. 확고한 주관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나혼자 만의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 좋은 약이라도 쓸데가 없으면 무용지물이 되는 것과 같다. 더구나 현대는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지식의 확대재생산이 중요한 가치가 되고 있다. 결국 성공과 지혜의 의미는 이처럼 현재진행형으로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빨리 읽으려 하지 말고, 천천히 음미해가면서 뜯어가며 읽는 것이 좋을 듯하다.

덧붙여, 시기를 두고 반복해서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반추하면서, 생각하며 읽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책 속에는 금과옥조가 될 수 있는 원석 같은 어구 들이 가득차 있다. 이 책을 읽는 과정을 굳이 빗대어 본다면 금광에서 원석을 캐어내는 과정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광부는 자신이 노력한 만큼 원석을 캐어낼 수 있다. 허리 한 번 더 굽히고, 땀 한 방울 더 흘리는 만큼 원석을 캐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급히 굴면 광산이 무너지고 말것이다. 그렇기에 세심한 주의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원석을 비로소 캐내었을 때, 원석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원석을 값진 보석으로 바꿀 수 있는 실천력과 결단이 필요하다. 또한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 우리들 주변에 있는 성공이란 원석을 발견하고, 캐어내고, 그 원석을 나에게 가치있는 과정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오늘 하루도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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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그대 신을 벗어라>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여기서는 그대 신을 벗어라
임광명 지음 / 클리어마인드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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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물은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하지만 국내 건축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은 많지 않다. 여행을 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어딘가를 방문하면 싫어도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건축물이며, 우리의 일상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의,식,주의 중요한 일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쉬운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렇게 국내 건축물에 대한 책이 나온 것은 반길 일이다.

우리는 해외여행을 가면, 그 나라의 도시의 모습, 그리고 건축물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그 예술성과 기술에 찬사를 보낸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나라가 예부터 건축기술에 남다른 조예가 깊었다는 것은 간과하고 있었던 듯하다. 세계 최고의 목조건물이 우리나라에 현존하고 있고, 세계최대의 목조건물 또한 우리나라에 있었으나 전란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그외 석탑이나 목탑 건물의 기술은 경이롭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석굴암의 기술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도시의 모습도 아름답다. 지금 우리가 흔히 보는 도시의 모습은 우리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의 개발정책으로 아무렇게나 개발되어지고 간편하고 저렴한 방식으로 마구잡이로 증축되어진 건축양식이 잔재로 남아 있어 도시의 미관을 해치고 있다. 얼마전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하회마을 이나 경주양동마을은 외국인들이 극찬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앞으로 도시의 미관을 어떻게 가꾸고 회복시켜 한국적인 정취를 되찾고 현대와 조화시키느냐는 앞으로 우리들의 과제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종교 건축이란 의미를 넘어 우리에게 우리 건축물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다는 면에서 그 효용이 크다.

먼저 책은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것 같이 다양한 종교 건축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성당, 사원, 절 등 다양한 종파의 건축물을 엿볼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이처럼 다양한 종교의 건축양식이 존재함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은 일반적이고 개론적이라 할만하다. 후에 종교인들과 건축가가 함께 각 종파별로 건축물에 대한 보다 소상한 정보를 담은 책을 내 놓는다면 더욱 볼만할 것이다.

교회나 사찰 등 종교건축은 본질적으로 다른 건축과는 다르다. 거기에서는 거룩함과 세속적인 것, 영원함과 무상함이 서로 만난다. 신 혹은 절대자를 향한 예배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기쁨이나 슬픔, 고통과 환희 등 모든 인간적 관심사를 해소하는 안식의 공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영성이나 깨침과 같은 종교적 이상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면서 당대의 최고 지성과 고도의 기술이 속에 갈무리돼 있다.

종교건축 뿐만 아니라 종교의 발전은 예술고 문화의 발전과 그 시대를 함께 했다. 그만큼 종교건축 분야는 현대건축의 발판이라 할만큼 그 기술과 예술이 전형으로 발전하여 있다. 그렇기에 종교건축을 보노라면 그 종교의 특징과 건축물의 기술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재미가 있어서 좋다.

합판과 합판 사이에는 예배당 내에서 발생하는 여러 소리들을 공명시키거나 흡수하는 역할을 하는 세로로 긴 직선의 홈들이 나 있는데, 간헐적으로 그 홈들을 햇살 끌어들이는 창으로 활용해 놓았다. 합판과 홈, 채광창들이 어우러진 그 모습이 질서정연하면서도 마치 음표들이 악보 위에서 자유분방하게 춤추는 것처럼 묘하게 율동적이다.

종교건축물은 현대과학과 예술, 그리고 영성으로 충만한 종교의 만남이다. 일반적으로 상반되는 것으로 알려진 종교와 과학이 종교건축에 와서 하나가 되는 모습에서 종교와 과학은 오묘한 이치를 탄생시킨다. 어찌 보면 종교와 과학은 상반되는 것만이 아닌 상생할 수 도 있는 것이고 서로를 보완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 건축물이라는 말이 허투루 나온 것이 아님을 알겠다. 전문가들은 화려한 로마네스크에다 비잔틴 양식의 부드러움까지 갖췄다고 한다.

로마네스크 양식, 아랍의 모스크 등 이슬람 양식, 고딕양식, 비잔틴 양식, 그리고 다양한 불교 건축 양식 등 국내에서 이처럼 다양한 건축 양식을 모두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실로 볼거리가 가득하다. 건축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다양한 시대와 장소를 아우르는 건축물과 그 아름다움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다. 시간을 내어 건물들을 찾아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이국적인 풍모를 느낄 수도 있다.

둥그런 외형에 돔 형식으로 불룩한 지붕이 꼭 비행접시처럼 보인다. 산속에 전통 한옥 형태로 지어진 절만 보아온 아이에게는 도심 주택가에 자리 잡은 색다른 형태의 사찰이 기이하게 느껴졌나 보다.

종교건축의 변화를 엿볼 수도 있다. 어쩌면 가장 변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종교이기도 하지만 종교건축의 모습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현대적 건축과 실험적인 건축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이 종교건축물이다. 종교적인 특징을 잃지 않으면서 현대적인 모습과 어우러진 외관을 설계한다. 또한 현대적인 요구와 필요에 부흥하면서도 본래 종교적인 필요에도 부흥하도록 설계한다. 이처럼 현대화, 그리고 필요와 요구가 다양해지면서 건축에 필요한 기술 또한 진보하고 있다. 어쩌면 현대 건축이 지양하고 나아가야할 여러가지 실험의 장이 곧 종교건축의 현장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는 그대 신을 벗어라 는 간략한 서두만 있을 뿐, 그 흔한 저자주나 에필로그가 없다. 그만큼 종교건축에 대한 서술에만 모든 전력을 다하고 있고 다른 설명이 필요없이 그 내용 자체만으로도 풍부한 이야기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책을 다 읽고서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다양한 건축물에 대해 더 상세하게 담지 못한 지면의 한계라 할만하다.  

덧붙여 여기서는 그대 신을 벗어라 는 중의적 의미를 지녔다고 하겠다. 신을 벗는 다는 것에서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경건함을 뜻하기도 하겠지만, 현대과학과 기술의 총아인 종교건축물을 앞에 두면 잠시 신에 대한 생각은 접어두어도 신성모독은 아니라 할 것이다. 종교건축이 가지는 오묘함과 흥미를 잘 표현한 제목이라 하겠다.
  
종교적 개념과 이해가 건축물에 어떻게 녹아들어 갔는지 이해하는데에 있어 종교에 대한 관심이 없더라도 그 재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고, 오히려 평소에 관심이 없었다면 그 과정에서 새로운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평소에 건축을 우리가 흔히 보는 건설업 정도로 생각했다면 이 책을 읽고나면 건축물을 보는 시각이 새롭게 열릴 것이다.

건축은 온갖 과학과 지성의 만남일 뿐만 아니라, 도시의 외관과 미관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요구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다양한 요구를 만족시켜주는 인간에게 필요한 기본생활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건축에 대해 가지는 의식은 그에 많이 미치지 못한다. 건축이란 짓는 것에 그치는 것도 아니고, 짓는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건축현장 혹은 건물에 때론 탄성하기도 하고 때론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스윗트 홈을 그려보고는 했을 것이다. 이제부터 스윗트 홈 뿐만 아니라 주변의 건축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세계적으로 디자인의 중요성이 관심을 받으며 서울이 디자인 도시로 선정되는 등 그 노력이 한창이지만 일반 시민들의 관심이 없다면 실효를 보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 작은 관심들이 모인다면, 우리 도시-우리나라의 외관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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