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사람 대부분은 '좋은 사람'으로 분류될 만한 사람이지만, '안좋은 사람'에 속하는 사람도 몇명 있다. 좋은 사람만 보고 살면 얼마나 좋게냐만, 가끔은 좋지 않은 사람도 만나야 하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희한하게도 좋지 않은 사람의 존재는 매우 크게 느껴지며, 내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내가 '절대악'으로 분류해 놓은 모 여사 역시, 끊임없이 나와 마주치며 나와 내 지인들을 괴롭힌다. 그 여자가 그간 저지른 악행을 모두 얘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여기서는 그저 그 여자의 얄미운 점 한가지, 굳이 표현하자면 '물귀신 작전'이라고 할만한 일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SOD
SOD는 효소 이름으로, 방사선 같이 해로운 물질이 들어오면 생명체는 이 효소를 분비함으로써 방사선 조사로 인한 산소독성을 중화시킨다. 그러니 이에 관한 실험을 한다는 게 별로 새로운 것은 없지만, 연구라는 게 어떻게 매번 창조적일 수 있는가. 남이 해파리의 DNA가 이중나선 구조라는 걸 밝히면, 다른 사람이 "불가사리의 DNA도 이중나선이다!"라는 걸 새로운 것인 양 논문으로 쓰는 게 대부분의 연구, 그러니 내가 기르는 생명체에 방사선을 조사해 SOD가 증가하는 것을 밝히는 걸 무작정 비난하기만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사흘간 약리학교실에 가서 SOD를 측정했다. 양해는 구했지만, 다른 과에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가운데 일을 한다는 게 나처럼 숫기 없는 놈한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데이터가 제법 잘나와 혼자 좋아하고 있는데, 악의 축이 다가왔다.
"마선생, SOD 재고 있다면서요? 나도 잴 거 있는데, 좀 해줄래요?"
맹세코 말하지만, 그녀는 이전까지 SOD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 여자가 우리 과에 온 몇년간, 단 한번도 그에 관련된 일은커녕 논문 한편 읽어보지 않은 터였다. 그런 사람이 왜 갑자기 SOD 타령일까? 기계 잘 썼다고 인사를 하고, 아이스크림까지 사다준 마당에 또다시 거기 가고픈 마음이 없었기에, 적당히 얼머부렸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건만 그 여자가 SOD를 측정했다는 얘길 난 들은 바가 없다.
2) 뱀
실험을 위해 뱀을 몇마리 잡아야 했다. 연구비가 없는 나로서는 그냥 내 돈으로 뱀 열다섯 마리를 사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 악의 축이 등장했다.
"마선생, 뱀 사왔다면서요? 몇마리 필요해요? 나도 뱀을 좀 써야 하거든"
아니 갑자기 웬 뱀타령? 내가 열마리쯤 쓰면 될 것 같다고 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난 다섯 마리로 들었어요. 열마리 값 줄테니 다섯마리만 써요"
아니 내가 사온 뱀을 다섯마리를 쓰건, 열마리를 쓰건 무슨 상관이람? 열이 받은 나는 그 여자와 대판 싸웠고, 결국 "그 뱀, 너 다 가져!"라고 소리를 치고는 곧바로 가출해 버렸다. 휴대폰도 끈 채로. 생각 같아서는 그 뱀 모두를 목졸라 죽이고 싶었지만, 참기로 했다. 뱀이란 놈은 매우 징그럽고, 목을 조르려 해도 구체적으로 어디가 목인지가 확실치 않으니까. 결국 난 하려던 일을 때려 치웠다. 그 여자? 모르겠다. 그 뱀을 가지고 어떤 훌륭한 일을 했는지. 하지만 그 여자는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내가 그 여자를 싫어한다는 것을.
3) 노래
뱀 사건 이후 말도 안건네던 우리 사이는 다른 선생님의 중재로 말은 하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다시 그 여자를 만날 때마다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1월 6일, 우리 과 신년회가 있었다. 거기서 그 여자는 나이에 비해 신곡이라 할만한, 미나의 <전화받어>를 불러 갈채를 받았다. 그에 대항해서 내가 부른 노래는 자두의 <김밥>, 연습이 덜되어 잘 못불렀고, 반응도 썰렁해 부르다 정지 버튼을 눌러버렸다.
어제, 우리과 사람들이 다시금 술자리를 가졌다. 보드게임방에 가자는 다수 의견을 무시한 채, 우리 교수님은 노래방을 강행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새로운 노래를 준비했다면서 <김밥>을 부르는 게 아닌가. 신곡이라곤 그거밖에 모르는데다, 그동안 충분히 연습을 해 이번엔 잘 부를 수 있었는데. 그 여자의 <김밥>은 엉터리였다. 음정도 틀리고, 박자도 영 안맞았다. 그러니까 그 여자는 한 두어번 들어보고 노래를 불렀던 거다. 왜? 내가 못부르게 하려고. 왜 그리 내 일마다 초를 치려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내가 하는 일들이 좋아 보여서, 맹목적인 추종을 하는 것일까? 어찌되었건 난 한곡의 노래도 부르지 못했다. 이 정도면 그 여자를 악의 축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