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소재, 툭하면 우려먹는다고 짜증내실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마음이...> 개봉을 며칠 앞둬서일까요.

요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든 두편의 꿈을 꾸었답니다.

첫 번째는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 며칠 전.

흰털을 가진 개 한 마리가 제게 다가옵니다.

보니까 벤지입니다.

꿈 속의 제 말이 가관이었지요.

“어? 너 살아 있었구나!”

전 벤지를 껴안고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가움을 표시했지만

벤지 녀석은 그저 담담하게, 살아생전 늘 그랬듯이 제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까먹었지만

그 장면은 생생히 기억나네요.


두 번째는 바로 어제입니다.

제 주량을 뛰어넘는 술을 마시고

초인적인 귀소본능으로 집에 왔는데요

천안서 서울까지 오느라 무진장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시 반쯤 들어와서 여섯시도 되기 전에 일어났으니 몇시간 자지도 못했습니다.

그 4시간 반 동안 길고 긴 꿈을 꾸었답니다.

꿈속에서 전 벤지와 함께 있었는데

제가 벤지 밥을 며칠간 주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전 놀랐습니다.

“밥도 안줬는데 얘가 배고프단 소리도 안하다니!”

황급히 식탁으로 다가갔습니다.

여동생네가 먹다 남긴 매운탕이 있습니다.

맵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생선살을 바르고, 국물을 조금 뿌려서 밥을 만들어 줬습니다.

벤지는 그 밥을 거의 빛의 속도로 먹어치웁니다.

하기야, 며칠을 굶었으니 당연하지요.

한그릇 더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식탁으로 갔습니다.

매운탕은 없었습니다.

매제가 남은 걸 다 먹어 치웠고, 그나마 남은 건 어머니가 설거지를 하며 버렸다네요.

“그걸 왜 버려!”라며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순간 제가 벤지에게 물도 주지 않았다는 걸 깨닫습니다.

“엄마, 벤지 물그릇 어디다 뒀어요?”

아무리 찾아도 물그릇이 없습니다.

전 물그릇을 찾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납니다.

새벽 다섯시 48분이었습니다.


꿈이 현실을 꼭 반영하는 건 아닐 겁니다.

살아생전 전 벤지 밥을 안준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언젠가 떡이 되도록 술을 마셨는데요-늘 그놈의 술이 문제죠-

아침에 깨보니 제가 벤지 주려고 사놓은 닭을 주지도 않은 채 잠이 들었더군요.

그때 제가 얼마나 속상해했는지 그날 저녁에 보니 가슴이 좀 까매진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물,

벤지는 유난히 물을 좋아했지요.

그래서 노란색과 녹색, 두 개의 물그릇에는 항상 물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언젠가 1박2일의 출장에서 돌아왔을 때 물그릇이 둘 다 비어 있다고

엄마한테 무진장 화를 낸 적이 있습니다.

그런 기억들이 엄마에겐 지긋지긋했나봐요.

벤지가 죽던 날, 어머니는 물그릇을 비롯해 벤지를 추억할만한 건 모조리 다

패키지로 버렸습니다.

죽어라고 술을 마시고 돌아오니 그 모든 게 다 없는 거예요.

벤지가 제일 잘 입던 호랑이옷을 비롯한 옷 몇 점

고집이 세서 거의 신기지 못했던 신발 두컬레(지만 발이 네 개니 8개죠^^)

밥그릇, 물그릇, 벤지가 앉던 방석들...

그런 것들을 죄다 버렸다니 허망하더군요.

엄마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요.

하지만 엄마가 버리지 못한 게 하나 있습니다.

입냄새가 나지 않도록 매일 입에다 넣어 주라는 잇몸 청결제

플라스틱 튜브에 담겨 제 화장품 상자에 들어 있었던지라

엄마는 제가 쓰는 것인 줄 알았나 봅니다.(결정적으로 상품명이 영어였으니...^^)


그렇다고 제가 그 청결제를 보면서 벤지 생각을 하는 건 아닙니다.

추억할 누군가가 있고

그 누군가가 제 인생에서 길다면 긴 시간을 함께 한 소중한 존재였다면

그가 쓰던 물건이 하나도 없다해도

그를 그리워하지 못하는 건 아닐 테니까요.

누군가를 그리는 건 물건으로 하는 게 결코 아니더라고요.

제 몸과 마음에는 벤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고

거기엔 남은 생애 동안 우려먹기에 충분할만큼 아름다운 추억이 많이 담겨 있으니 말입니다

벤지 꿈을 꾸다 일어나면 슬퍼지지만

전 꿈에서라도 벤지를 볼 수 있다는 게 좋습니다.

따지고보면 어제 그런 꿈을 꾼 것도

제 마음에 남아 있는 벤지의 흔적이 꿈으로 변한 게 아닐까요.


어제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왕창 술을 마셔야 합니다.

그 친구에겐 불행한 일이겠지만

오늘은 벤지 얘기를 많이 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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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0-25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같은 주인을 만났다니, 벤지는 참 행복한 개였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인에 따라 행복의 정도가 달라지는 것이 개들이니까요.

paviana 2006-10-25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엔 제가 들어드릴께요..음 추억할 누군가가 있는 님이 부러워요.

Mephistopheles 2006-10-25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억하고 그러워하는데 대상이 누구인지 그 빈도가 얼마나 빈번한지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

하늘바람 2006-10-25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금요일날 마음이 봅니다. 얼마나 눈이 퉁퉁부어서 나올지 ㅠㅠ

moonnight 2006-10-25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없을 때 이렇게 그리워해줄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벤지가 부러워요. 벤지도 마태님이 많이 보고 싶어서 꿈에 찾아왔나봐요. ^^

비로그인 2006-10-25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지를 추억하는 마음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비로그인 2006-10-26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혼이 따뜻한 사람...... :)

다락방 2006-10-25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요, 정말.
마태우스님은 체셔고양이님 말씀처럼 영혼이 따듯한 분이시네요.
저는 애완동물 키우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마태우스님의 글을 읽다보면 애틋해져요. 뭔가 다른마음, 다른세상을 알게된달까요.

비자림 2006-10-26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를 키워보진 않았지만, 님처럼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이에 대한 그리움을 지닌 사람으로 공감이 많이 되요. 님, 벤지는 님 가슴 속에 늘 살아 있어요. 그걸 잊지 마시길!

모1 2006-10-26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지를 그리 사랑하는 마태우스님의 모습...안타깝기도 하지만 멋져 보이기도 합니다. 벤지는 정말 행복한 녀석..

마태우스 2006-10-28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1님/역시 개만한 사람은 없는 듯 싶어요...마당 있는 집에 가서 개 기르고시퍼요 엉엉
비자림님/가슴 속에 살아있음 뭐해요 엉엉. 개 기르고시퍼요..
다락방님/개 애호가들은 좀 다른 종류의 사람이랍니다 사람보다 개와 더 잘 소통하는...
고양이님/님도 개 기르시잖아요.... 개있는 집이 부러워요..
승연님/부끄러워요.....
달밤님/벤지가 보고파요 흑흑.... 달밤님도 보고파요. 흑흑
하늘바람님/마음을 넘 단단히 먹어서일까요.... 생각보단 안울었어요..
메피님/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쨌든 벤지가 보고파요...흑
파비님/추억할 누군가가 있는 것보단, 그 존재가 곁에 있는 게 훨 좋답니다
주드님/이해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