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번째: 혼자서

일시: 10월 11일(수)

엄마가 “지금 있는 사람(할머니 뒷바라지를 담당하는) 그만두면 사람 새로 안쓸래”라고 하시는 바람에 삐졌다.

“돈이 그렇게 아까워?”

“이모할머니가 그러는데, 저축도 하고 그래야 한데서.”

“앞으로 이모할머니란 사람이랑 놀지 마!”

삐졌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굶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다 배가 고파서 라면을 끓였고, 라면에 고추참치를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일찍 잤다.


102번째: 셋이서

일시: 10월 12일(목)


본4인 지도학생 두명이 지난번 모의고사를 잘 못봤다. 지도를 잘못했음을 통감하고 그 둘을 불렀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막상 만나니 그 말이 안나왔다.

“왜 저희만 불렀어요?”

“음, 그러니까... 국시 준비한다고 고생하는데, 격려차...”


원래 술은 안마실 생각이었다. 술을 마시고 나면 다음날 공부까지 지장이 있잖은가. 달랑 삼겹살만 시켰더니 애들이 묻는다. “술은요?”

그들에게 말했다. 마시고 싶으면 마시라고, 난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애들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소주를 시키잔다. 나 때문에 시킨 걸까 싶어 어제 마셔서 안마실 거라니까 마시겠다고 우긴다.

“처음처럼 한병 주세요.”

나는 반만 먹고 잔을 내렸는데 애들은 의외로 원샷을 한다.

“어, 저랑 지금 한번 해보자는 건가요?”

어제의 술 레이스는 이렇게 시작됐다.


한명은 오래된 애인이 있고, 다른 한명은 없다. 후자의 학생을 난 이렇게 위로했다

“애인이란 말이죠, 안경 같은 거예요. 쓰면 좀 더 잘 보일 수 있지만, 답답한 면이 있죠. 애인 있다는 건 자랑이 될 수 없어요. 안경 쓴 게 뭐 자랑인가요? 요즘은 라식도 있고 렌즈도 있잖아요. 근데 사람들은 ‘넌 애인도 없냐?’며 다른 사람을 탄압하죠. 그런 거에 구애받지 말고 좋아하는 걸 하면서 내실을 다지면, 맞는 여자가 찾아와요.”

연애에 대한 내 장광설을 그 학생은 맞장구를 쳐가며 경청했다. 사실 난 내가 그런 철학을 갖고 있는지 어제 처음 알았다. 애인과 안경, 정말 멋진 비유 아닌가.


공부 얘기를 여전히 못하고 있었는데, 애들이 먼저 그 얘기를 한다.

“교학과 가니까 선생님이 저희 성적 안좋다고 걱정했데요.”

성적을 확인해 주는 조교가 “아 내 지도학생들이 아래쪽에 있구나”라고 탄식한 걸 전해줬나보다. 시험 한번 못볼 수도 있다고 애들을 격려했더니 내가 걱정한단 얘길 듣고 너무 죄송했다고, 앞으로 열심히 할거라고 한다. 고마웠다. 그들에게 얘기했다.

“제가 아쉬운 건, 내년에 졸업하면 더 이상 학생들을 못본다는 사실이어요.”

그랬더니 애들이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뛴다. 아무리 바빠도 내가 모임을 한다면 찾아온단다.

“선생님 지도학생이라고 애들이 절 얼마나 부러워하는 줄 아세요?”

새삼 느낀다. 애들을 가르치는 보람은 바로 이런 거라고. 내가 그들에게 해준 거라곤 술 사주면서 농담 따먹기 한 거밖에 없는데, 그게 바로 애들이 원하는 거였을까?


1차에서 소주 다섯병을 비운 우리는 2차로 간 감자탕집에서 다시 두병을 비웠다. 그 정도면 내 주량은 다 채워진 셈, 근처 여관에 가서 흐물흐물해진 몸을 누인다. 이틀 연속으로 일찍 잤다. 술은 혼자보다 셋이 마시는 게 훨씬 더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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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6-10-13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좋은 술자리였겠어요. 학생들에게 사랑받는 교수라니! 너무나 근사해요 :)

BRINY 2006-10-13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애들 공부는 확실하게 시켜주셔야해요.

waits 2006-10-13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정말 멋진 교수님이네요. 아침부터 기분이 확 좋아집니다. 추천! ^^

ceylontea 2006-10-13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서는 술 마시지 마세요~~~

비로그인 2006-10-13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주사(?)를 부리셨던 이유가 주량을 채우셨기 때문인가요? ㅎㅎㅎ

건우와 연우 2006-10-13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는게 그렇게 여럿이 모여 비우는 소주잔처럼 작고 따뜻한 일상들로만 이루어지면 좋겠어요.^^

Mephistopheles 2006-10-13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부쩍..사랑과 애인...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흘러나오는 마태님의 페이퍼를
보고 있으면 마태님이 혹시 가을을 타는 건 아니신가 생각하고 있답니다..
(마님 마태님댁에 소개팅 놔드려야 겠어요..~~)
그리고 혹시라도 마태님과 술 마실 날이 온다면..꼭 마태님 비우는 양을 눈치껏
살펴보면서 마시도록 하겠습니다..^^

마노아 2006-10-13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마실 건가요? ^^

stella.K 2006-10-13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인과 안경이라...음, 곱씹을만 합니다. 내실을 기하라는 말씀 지당하다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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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뻐서 오랜만에 해 봤어요.^^


마태우스 2006-10-14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오오...6이 세개나 있네요! 캡쳐 감사합니다. 애인과 안경, 자주 써먹어야겠어요^^
마노아님/안마시려고 했는데 마셔버렸어요 흑흑
메피님/가을 타긴요... 절대 그런 거 아니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주변에 미녀가 아주 많습니다^^
건우님/그렇죠? 하지만 가끔 시련도 있어야 즐거움이 더 즐거운 법이겠죠... 저도 그렇거든요
고양이님/주, 주사라뇨... 저 보셨어요??
실론티님/안그러려고 합니다. 근데 가끔 어쩔 수 없이 그래야 할 때가 있더라구요
평택님/앗 평택 사시나요 기차타고 올라갈 때면 평택역에 늘 서곤 하는데.... 칭찬 감사드려요
브리니님/모르겠어요 제 방식이 옳은지... 지도학생 하나가 잘리고 난 담부터 부쩍 회의가...
다락방님/제가 아무리 근사해봤자 다락방님만 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