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9월 25일(월)
마신 양: 소주 한병 반
내 일을 도와주는 조교 선생이 고기가 먹고 싶단다. 다른 미녀들을 더 섭외했지만 그게 잘 안되어 그녀와 둘이서 술과 고기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 며칠 전 <전차남>이란 영화를 봐서 그런지 내 얘기는 ‘사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녀와 나눈 얘기들을 정리해 본다.
1. 저 높은 곳의 그녀
“너무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건 안좋은 듯해요”
외모도 그렇고-영화에선 안그런데 설정이 그렇단 얘기다-별반 내세울 것도 없는 전차남, 그는 우연히 만난 미녀에게 첫눈에 반한다. 그는 그녀와의 사랑을 열망하지만 그녀 같은 미녀가 자신을 사랑할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가닥 기대를 버리지 못한다. 때문에 전차남은 그녀의 한마디에 기뻐하고, 사소한 징후에 좌절한다. 결국 전차남은 그녀 앞에 나타나 울면서 말한다.
“당신이 떠나 버릴까봐 무섭다.”
그러니 너무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을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그녀의 미모가 빛날수록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이고, 그때부터 사랑은 기쁨이 아닌, 두려움이 되니까.
2. 사랑의 본질
“전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만한 정열을 다 잊었나 봐요.”
그녀와의 첫 데이트 때, 전차남은 어느 장소가 좋을지 고민하느라 여러 군데의 식당을 찾아다니며 시식을 해본다. 데이트 코스를 정하느라 인터넷을 뒤지고, 어떻게 해야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그를 응원하는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는 철저하게 그녀에게 종속되어, 그의 하루는 온통 그녀 생각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사랑에 쿨해지는 건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에 의해 기분이 좌우되기보다는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고 싶어서일 거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약자가 되는 길이며, 그 경우 느는 건 눈치뿐이다.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을 나도 좋아한다고 해야 하고, 그녀의 기분이 좋은지를 살펴야 하고, 그녀가 나 이외에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지를 걱정해야 한다. 사랑을 하게 되면 기쁜 일도 있지만, 이렇듯 성가신 일이 훨씬 더 많다. 그래서 난 누군가를 ‘너무 많이’ 좋아하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3. 조건
“사람의 마음을 믿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은 없지요. 전 왜 사람들이 조건을 따지는지 이해해요.”
미녀는 컴퓨터를 사러 왔다가 우연히 전차남과 조우한다. “사랑한다”고 울먹이는 전차남의 눈물을 닦아주며 미녀는 말한다.
“저도 사랑해요.”
미녀의 말은 계속된다.
“당신은 사소한 것들에 늘 ‘미안합니다’라고 말하고, 나의 모든 것을 소중히 여겨 주니까요.”
둘은 깊은 키스를 나누고, 영화는 그렇게 둘의 행복을 암시하며 끝을 낸다.
영화가 끝난 후 전차남 커플의 뒷얘기를 머릿속에 그려본다. 그녀만을 위한 전차남의 마음이 과연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그가 그녀에게 늘 미안해하고 고마워했던 건 미녀를 얻기 위해 초창기에 치러야 하는 희생이 아닐까? 그녀가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 그 마음이 변하면 어떻게 될까?
어떤 여자가 자상한 투스타와 결혼을 했다고 치자. 세월이 흘러 자상함이 없어진다 해도 그에게 별 둘은 남고, 그녀는 여전히 장군의 부인이다. 사람들이 조건을 따지는 이유는 사람의 마음만큼 변덕스러운 게 없기 때문이다. 마음은 변해도 조건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난 전차남 커플의 미래를 우려스러운 눈으로 볼 수밖에 없다. 내가 너무 비관적일까.
4. 결론
“기준을 낮추면 세상이 즐겁다”
내가 늘 하는 소리다. 이 원칙은 사랑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누군가를 사랑해도 너무 많이 사랑하지 않는 것, 이게 내가 생각하는 웰-러빙의 지름길이다. 그녀에게 지나치게 의존적이지 않을 수 있고, 그녀와 사귀는 동안 내 삶을 살 수 있으며,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을뿐더러, 그녀가 보내는 이별의 메시지에 너무 많이 좌절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이런 쿨함은 오히려 자신을 매력적으로 포장할 수 있으며, 그녀의 도전의식을 불태울 수 있다-쟤는 왜 내게 충성하지 않는 거야? 안타까운 사실 한가지. 왜 난 이런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