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과 학과장이 바뀌었다. 나와 입사동기로, 그래도 꽤 친분이 있는 편인 K 선생이 그만두고 C 선생이 새로 학과장이 되었다. 학장과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학과장을 그만두는 K 선생은 희희낙락인 반면, 유임이 되어 일 년간 더 학과장을 해야 하는 나와 J는 부러운 눈으로 K를 바라봤다.

“한턱 내셔야겠어요.”

J의 말에 K는 웃으면서 그러겠다고 한다. 회사에서야 무슨무슨 장이 좋지만, 대학에서는 서로 안하려고 하는 게 바로 ‘장’이다 (사람에 따라 틀릴 수도 있지만). 그런 ‘장’을 난 일년간 더 해야 한다. 보직을 맡아서 좋았던 건 “학교란 곳은 몇 사람의 희생으로 돌아간다”는 걸 알게 된 거지만, 그걸 이미 깨우쳤는데 일 년이나 더 학과장을 해야 한다니 솔직히 심난하다.


하지만 나보다 더 심난한 사람이 있으니, 그녀는 새 학과장을 맞이한 조교다. 전임자인 K 선생은 성격을 굳이 구분하자면 말이 없고 인자한 편인데, C는 그 반대. 평소에 C와 거의 말을 해보지 않아서 성격을 몰랐는데, 식당에서 학교까지 차를 타고 간 4분 동안 모든 게 파악이 되었다. C는 우리가 있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교를 잡다시피 했다.

그전 공문 있을 거야. 찾아봐.”

저장만 돼 있다고? 그런 게 어딨어? 출력해서 한부 갖고 있어야지.”

스무장? 그게 뭐 어떻다고? 서른장, 마흔장이라도 뽑아야지.”

“내가 말 한마디 하면 바로 알아들었으면 좋겠어.”

그거 봐. 전혀 감을 못잡고 있네.”

“너 오늘 두시에 퇴근 못하겠다.”(방학 때 조교들은 두시까지 근무한다).

조교의 얼굴은 점차 창백해졌다.

조교: 선생님, 저 내일부터 휴가인데요

C: 언제까지?

조교: 월요일이요.

C: 기네. 휴가 가기 전에 다 해놓고 가야겠다.

차에서 내려 학교까지 가는 동안 약간의 틈이 있었기에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앞으로 고생길이 훤하네요.”

그녀가 낮게 속삭인다. “저 의예과로 옮기면 안되요?”


이건 내 자랑이지만 우리과 조교 선생은 운이 좋은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난 평소 그녀에게 뭔가를 시키는 걸 자제했으며, 시시 때때로 점심을 샀으며, 친구처럼 서로 할 말 다해가면서 잘 지내고 있으며, 그녀의 휴가가 사흘밖에 안되는 게 안돼 보여 “그냥 한 열흘 쉬세요”라고 말했으며-교학과의 제지로 실현되지는 않았다-휴가비도 따로 줄 생각이잖는가. 이렇게까지는 아니지만 그 조교도 그 동안 별 문제없이 살았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학과장의 교체는 얼마나 재앙일까?


생각해보니 내가 일 년 더 학과장을 하는 게 좋은 것 같다. 그 조교는 내가 직접 뽑은 사람인데, 성격이 깐깐한-모든 교수는 나보다 깐깐하다. 이건 진리다-사람이 후임으로 와서 우리 과 조교를 괴롭히면 내가 얼마나 미안하겠는가. 그래, 이왕 하는 학과장 즐겁게 하자. 그리고 후임자 선정에 내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면, 다른 건 다 차치하고 성격만 보자 (그랬더니 후보가 한명으로 압축된다). 그게 나만 믿고 이곳에 온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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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7-18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봐도 천안에 천사가 강림했나 봅니다..

paviana 2006-07-18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조교시켜주세요.경력도 있어요.ㅠ.ㅠ

ceylontea 2006-07-18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태님과 일하고 싶어요... 휴가 열흘.. 오예~~!! ^^

전호인 2006-07-18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쒸!!! 윗분들은 인자한 분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글 윗부분은 흐림, 밑부분은 활짝 개임입니다.
마태우스님의 너그러움과 인자함이 베어나오는 글입니다.
서로에 대한 배려!!!!!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가을산 2006-07-18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역시 상사를 잘 만나야....
전 휴가 이미 다 까먹었슴다.... OTL

비로그인 2006-07-18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고생길이 훤한 그 조교분이 안쓰러워집니다. 이전에 함께 일하던 상사가 그런 스타일이었는데, 그 분의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쿵쾅거렸어요. 퇴근해서 집에 가있는데도 아홉시, 열시에 `그 파일 어디 있느냐' 전화받는 거야 당연지사고..저도 마태우스님같은 상사와 일하고 싶습니다.^^

sooninara 2006-07-18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도 ktx타고 출퇴근 가능한데..조교 필요 없으신가요?

건우와 연우 2006-07-18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같은 상사는 좀 드물죠..^^
다년간의 제 경험으로 보통 직장에서 독한 상사를 만났을때의 생존법은 확실하게 한판 붙을건지, 혹은 확실하게 비빌건지....단 어떤경우에도 일처리는 완벽할것.
근데 학교에서도 이방법이 통할까요...^^
불쌍한 조교....

비자림 2006-07-18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친구가 예전에 조교하면서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았는지... 이 글 보고 그 때 그시절이 생각나네요. ^^
아마 스트레스 주시는 그 교수님은 업무파악이 잘 안되어, 즉 능력부족인 경우가 맞을 거에요.

비로그인 2006-07-18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만쉐이~~~

또또유스또 2006-07-18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의란 제목에 중간 까지 읽다가
... 안되보이는 그에게 다가가 앞으로 고생길이 훤하다는 말을 건낸 것이
나의 예의였다 뭐 이런 것인줄 알았어요 .
왜 전 님의 글을 제 멋대로 해석할까요?
그래서 추천...

바람돌이 2006-07-18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을 만나다니 그 조교님 복터졌군요. ㅎㅎㅎ
학교에서 조교하던 사람들 옆에서 좀 봤걸랑요.

마태우스 2006-07-19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에이...복 터졌다고 할 정도까진..부끄러워요
유스또님/제가요 늘 반전을 넣으려고 노력한답니다 호호호
여대생님/님의 만쉐는 제게 큰 힘이 되옵니다. 감사합니다.
비자림님/그러면 좋겠지만, 제 생각엔 성격 같사옵니다.... 그건 안고쳐지잖아요..
건우님/학교에서 그러는 건 정말 어렵죠. 한판 붙어도 조교만 나무랄 뿐 다 선생 편을 들걸요
수, 수니님/뭐 한시간 십분밖에 안걸리긴 하지만....님이 워낙 바쁘셔서 될지 모르겠어요^^
주드님/어마 주드님! 저두 주드님과 일하고 싶어요! 일단 대형서점부터 하나 인수할까요?^^
가을산님/님은 제가아는 분 중 가장 휴가를 알차게 보내신 분이랍니다. 존경.
전호인님/그런 의미에서 오늘 비가 안오게 해주시어요^^
실론티님/6개월이 안되서 3일밖에 안된다나요. 글구 방학 땐 일이 그다지 없잖아요...열흘 갔으면 좋은데..
파비님/기다리세요 님의 출판사를 곧 인수할 생각입니다
메피님/천사는 무슨 천사입니까. 체중이 많이 나가서 날 수가 없다는....^^

모1 2006-07-19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교수 앞으로 1년이 더 편하게 된것이군요. 그분께 축하드립니다.
(그래도 학교의 장 중 총장은....서로 하려고 하는 것 같던데요. 장관이 와도 무시할 수 있는 자리라고 하더라는..)

마태우스 2006-07-20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1님/총장은요 정치인이랍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관심 없을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