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간 내기가 만만치 않은지라 영화 두편을 하루에 보기로 했다.
1. 아치와 씨팍(이하 아치)
예고편을 볼 때 무지하게 유치할 듯 싶었던 이 영화를 끝내 본 건 양심의 외침 때문이었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해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 피카디리가 선택된 건 ‘아치’와 ‘캐러비안의 해적’(이하 해적)을 모두 상영하는 몇 안되는 극장이어서였다.
관객이 없을 걸로 예상은 했지만 극장 안에 단둘이 있는 기분은 좀 묘했다.
“전화 진동으로 바꿀 필요 없겠네?”
나와 미녀는 큰소리로 떠들며 자유를 만끽했는데, 영화 시작 전 두 팀이 더 들어왔다. 사람도 별로 없는데 에어콘은 왜 그리 빵빵하게 틀어대는지 이해가 안갔지만, 추위에 떨면서도 사람을 졸리게 만들 수 있다는 데 그 영화의 위대함이 있었다. 90분의 상영시간이 왜이리 길게 느껴지는지.
십년쯤 전 일이 자연스럽게 떠올려졌다. ‘블루 시걸’이란 영화를 보러 가면서도 오늘과 같은 마음을 먹었었지. 한국 애니메이션에 한 획을 그을만한 영화라고 선전하면서 당시 여친과 친구 커플을 꼬셨던 기억. 그리고 영화가 끝난 후 허탈하고 민망해서 밥을 사며 때우려고 했던 기억도. 오늘 역시 같이 봐준 미녀에게 미안했다. 그 영화를 본 다른 커플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너 때문에 봤잖아!”
한국 애니메이션이 발전을 하든지 말든지, 앞으론 내 갈 길을 가련다.

2. 해적
1편을 보지 않아서 가졌던 일말의 불안감, 그리고 아치 때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졸음, 하지만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이런 걱정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영화가 상영되는 140분 동안 난 옆자리 미녀에게 ‘정말 재밌다.’는 말을 열 번 정도 한 것 같다. 조니 뎁의 능청스러운 연기, 매력이 넘치는 키라 나이틀리, 그 둘을 뛰어넘는 멋진 볼거리들, 그럼에도 영화 가격이 ‘아치’와 똑같은 7천원이라니 너무 하지 않은가.
세계적으로 흥행을 한 1편을 안본 이유는 역시 십여년 전에 봤던 ‘컷스트로 아일랜드’가 너무도 재미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과 해적은 바다를 무대로 했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 없지만, 사람이란 원래 자라 보고 놀라면 솥뚜껑도 무서워하기 마련이지 않는가. 하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않을 거다. 이 영화를 통해서 내 몸에 바다 사나이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1편이 워낙 히트를 하는 바람에 2편과 3편이 거의 동시에 만들어져, 조금만 기다리면 결말 부분을 볼 수 있다는 사실. 당연한 얘기지만 그 전에 1편의 DVD를 구해서 볼 생각이다. 2편보다는 볼거리가 덜하겠지만, 조니 뎁의 멋진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듯싶다. 조니 뎁 하면 ‘가위손’밖에 떠오르지 않고, 보진 않았지만 그 영화 때문에 조니 뎁이 우울하고 내면적인 연기를 주로 하는 줄 착각을 했었다. 근데 이런, 이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배우가 있담.
정리하면 이렇다. 아치로 쌓인 우울, 해적이 풀어줬다. 아름다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