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빈둥거렸다. 글을 한편도 안썼고, 책도 안읽었다. 교정 볼 게 있어서 원고와 씨름하면서 자다 깨다 한 게 현충일의 내 모습, 이렇게 휴일을 날려서야 되겠는가 싶어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엄마를 꼬셨다. 내가 보고픈 건 6월 6일 전세계 동시개봉을 한 <오멘>이지만, 엄마는 무서운 걸 좋아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포세이돈>으로 꼬셨다. 알았다고 한 엄마, 친구 분들과 전화통화만 하더니 “피곤해서 안가겠다.”고 하신다. <오멘>을 혼자 보려니 싫었다. 개봉작은 사람이 꽉꽉 차니, 혼자 보면 서러우니까. 아는 미녀에게 전화했다. 시간이 된단다. 하지만 극장에 가니 오멘은 이미 매진, 할 수 없이 미녀가 보고 싶다는 <가족의 탄생>을 보기로 했다.


내가 생각하는 한국영화 최고의 속편은 <여고괴담2>였다. 전편의 인기에 편승한 황당한 귀신영화일 거라는 생각에서 영화를 보지 않았는데, 나중에 비디오로 보면서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가 있다니!’라며 전율했었다. 그 감독이 만든 게 <가족의 탄생>,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이렇게 좋은 영화가 왜 상영관 찾기가 힘들지?”라는 어느 영화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빈치코드>와 <미션3>에 여러 개의 상영관을 할당한 극장들, <탄생>에 하나 정도 할애하는 게 그렇게 어렵니?


<탄생>은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은 짐이 되고, 혈연과 무관한, 이런저런 인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오히려 더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가족에 대해 염세적인 나는 이 영화의 메시지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기에 공효진이 죽은 엄마가 남겨준 가방을 보면서 오열하는, 그러니까 혈연의 가족도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남기는 것에 조금은 서운했다. 물론 내가 혈연으로 이룬 가족을 전면 부정하는 게 아니며, 나만 해도 엄마와 오순도순 즐겁게 살고 있지만, 그런 얘기야 우리 사회에서도 징그럽게 많이 하는 거니 굳이 이 영화에서까지 반복해서 듣고 싶진 않았다. 그 점이 진부하게 느껴졌을 뿐 영화는 재미와 유머, 그리고 카타르시스 면에서 거의 최고였다. 문소리가 남동생을 내쫓고 문을 잠그는 마지막 장면이 특히 시원했는데, 그걸 보니 영화에서 전하고자 하는 또 다른 메시지가 가족 안에서 남자들의 역할에 대한 회의라는 생각이 든다. 가정을 위태롭게 만드는 건 남자고 그걸 이겨내가며 가정을 지키는 건 여자인 걸까?

 

이 여자가 모두에게 친절한 여자고 봉태규가 그녀 때문에 열받는 남자다.

 

서로 연결된 세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영화에서 세 번째 에피소드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앞의 두 얘기와의 연결을 가져온다는 것 이외에, 그 에피소드의 여자 주인공이 마치 날 보는 듯했기 때문.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잘하는-사실 난 그렇지도 못하지만-그녀는 결국 애인인 남자 주인공을 화나게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 그렇게 가치관이 다른 남녀는 헤어지는 게 마땅하겠지만, 생각해보면 나도 연애를 할 때 다른 사람을 만나느라 바빠 여자친구에게 소홀할 때가 많았다. 다른 사람에게 돈을 쓰고 애인에게 밥을 얻어먹는다든지, 일주에 한번 만나는 것도 힘들고 그나마도 피곤한 모습만 보인 것 등이 생각나 영화를 보는 내내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다. 그러면서도 난, 영화 속의 여자가 그랬던 것처럼, 헤어지자는 여인에게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었지 않는가. 거듭 말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친절한 사람은 결코 좋은 애인이 될 수 없으며, 나 또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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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06-07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애인에게만 잘해주고 다른 사회적 관계에 소홀한 사람도 결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지 않아요?

마태우스 2006-06-07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아앗 그, 그것도 그렇네요. 하지만 두 극단 중 택일을 하자면 그런 사람이 애인으론 더 좋다는 거죠

sooninara 2006-06-07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영화 보고 싶네요. 그런데 벌써 다 내렸던데..ㅠ.ㅠ
혈연이 힘들때가 많은데..알라딘마을에서 만난 이웃사촌들은 언제나 힘이 되어주죠.
저도 대구 와서 알라딘 없었으면 정말 힘들었을 겁니다.

하루(春) 2006-06-07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 애인에겐 '헤퍼 보이는' 친절남인가 보군요.
참, 저 <짝패> 봤어요. 끝내주더군요. 류승완 영화 앞으로도 계속 극장에서 보려구요.

모1 2006-06-07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지난주인가 보았었죠. 나름대로 괜찮았는데..중간에 좀 지루했어요.

2006-06-07 2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야클 2006-06-07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한테도 좀 친절해 보세요. -_-b

로드무비 2006-06-08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자'를 만나면 절로 그렇게 됩니다.
마음이 집으로 달려간다던데요?
주변에 친구를 너무 좋아해서 좀 거시기했던 사람들도
임자 제대로 만나니 끝이던데요, 뭐.
마태우스님은 그렇게 될까봐 무서우신 거죠?
다 알아요.=3=3=3

한솔로 2006-06-08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멘 안 보시길 잘하셨어요. 기대에 차서 봤는데...어휴....

마태우스 2006-06-09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솔로님/아 그래요? 다행이네요...사실은 오늘도 볼까 하다 말았는데 거듭 다행..
무비님/임자라...제 친구 중에도 그런 애들이 몇 있지요. 갑자기 가정적으로 돌변한 애들... 가정에서 나름의 재미를 찾는 친구들도 존중하지만 아무래도 밖이 더 재밌지 않을까요?^^
야클님/제겐 님밖에 없습니다^^
속삭이신 분/아이 제가 원래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모1님/아앗 지루하셨다니...공감이 별로 안되셨나봐요....전 흠뻑 빠졌는데
하루님/정말 짝패 재밌죠? 어찌나 감동했는지...제 맘속의 류승완 랭킹이 급상승했다는..
수니님/제가 별반 도움 못드려서 죄송합니다.... 언제 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