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저도 제가 옳다고 여기는 건 아닙니다. 불쾌하게 느끼신 분들께 죄송합니다.
난 개 우월주의자다. 테레사 수녀처럼 사람 중에도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한 영혼을 가진 분이 있지만, 그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개는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난 ‘개만도 못한’이란 욕을 싫어하고, 희대의 성폭력범에게 ‘발바리’란 별명을 붙이는 것에 반대한다. 거기에 더해서 사람을 입양할 때 자격 심사를 하는 것처럼, 개를 기르겠다는 사람도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해 5만마리 이상의 개가 버려지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내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버려진 개를 볼 때마다 난 마음이 짠하다. 녀석이 뭘 먹을까, 잠은 어디서 잘까 하는 생각에 눈시울이 벌써 화끈거리고, 비라도 오는 날이면 그 짠함은 한결 증폭된다. 이런 나한테 “왜 넌 사람이 굶주리는 건 생각 안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내가 한낱 견권 옹호자일 뿐, 인권 옹호자는 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으리라.
개를 그렇게 좋아하기에 TV나 영화에 개가 나오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동물이 주인공인 영화가 유치하다고 안보는 사람도 있지만, 난 웬만하면 극장에 가서 관람하는 편이다. 하지만 다음 영화는 도저히 볼 수가 없다. <에이트 빌로우>라는 영화는 개가 주인공이지만, 마음이 아파서 도저히 볼 수가 없을 것 같아서다. 내용을 말하자면 이렇다 (이하 시네 21 참조). 남극 탐사대원이 썰매개 8마리를 데리고 남극에 가는데, 동상에 걸려 개를 버려두고 떠나버린 것. 그 뒤 “개들은 사슬을 끊고 생존을 위한 투쟁을 시작”한다. “갈매기를 사냥해 배를 채우고 폭풍 속에 웅크리고 잠”이 든다는 대목에 이르면 벌써 눈시울이 화끈거린다. “죽어가는 동료의 몸을 핥는 개들의 애잔한 눈빛과 원초적 생의 의지에 기대고 있는 작품”이란 설명을 읽을 때, 난 이 영화를 도저히 볼 수가 없으리라는 걸 깨닫게 된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영화가 1958년의 실화를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것. 실화에서는 “2마리의 개만이 살아남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극한에 팽개치고 간 탐험대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다.”
남극 탐험은, 1983년 개 홍역이 바다표범에게 전염될까봐 썰매개의 출입을 중지시키기 전까지는 개들의 희생을 딛고 이룬 것이었단다. 우리가 아는 아문센도 개를 데리고 가는 이득이란 게 식량으로 쓸 수 있다는 거라고 공언했었고, 실제로 52마리의 개를 데리고 간 아문센이 남극점에 도달했을 때 단 18마리의 개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이것 역시 시네 21 참조). 자신의 동료들을 하나둘씩 잡아먹는 걸 보면서도 그의 썰매를 묵묵히 끌었던 개들의 미련함에 짜증이 난다. 확 물어 버리지 왜 계속 그의 식량이 되기를 자초한 걸까. 하지만 거기서 아문센을 물어 죽인다면 그건 이미 개가 아니다. 악덕 주인에게도 무한한 충성을 베푸는 것, 그게 바로 개다. 벤지를 매처럼 어깨에 얹고 다니던 내가 실수로 벤지를 떨어뜨렸을 때, 벤지는 내가 화난 줄 알고 눈치를 살폈다. 내게 짖기라도 했다면 덜 미안했을 텐데, 벤지 역시 한 마리의 ‘개’였고, 다른 개들처럼 사람의 경지를 뛰어넘는 단계에 있었다.
여섯 살 어린이가 개에게 물려 중태라고 한다. 이 사건 말고도 개에게 물리는 사고는 가끔씩 발생한다. 사람을 무는 개는 이미 자신의 견성을 잃어버린,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다. 그 어린이의 일은 정말이지 안타깝지만, 그것 때문에 개 전체가 폄하되어서는 안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천안 연쇄살인, 마포구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 등 파렴치한 사건들을 수도 없이 일으키는 존재는 과연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