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방이다. 일요일 밤 이런 곳에 있는 이유는, 딱히 갈 데가 없기 때문이다. 어제까지의 힘든 일정 때문에 오늘 하루는 정말 푹 쉬고 싶었다. TV도 보고 농구도 보면서. 하지만 세상 일은 마음대로 안되는 법, 남동생이 애를 데리고 온단다. 잽싸게 옷을 챙겨입고 길을 나섰다. PC방에서 노닥거리는 게 조카랑 놀아주는 것보단 덜 힘들 테니까. 조카가 싫다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애와 놀기엔 너무 피곤하다.


46번째: 4월 4일(화)

작년 이맘때, 예과 MT를 따라갔었다. 그때 얘기. 대천에 도착하자마자 허름한 숙소에 짐을 푼 학생들은 미리 준비한 한솥도시락으로 저녁을 먹었다. 잠시 모래밭에서 체육대회를 한 학생들은 방에 들어가 새우깡에다 소주를 마셨다. 밤 11시를 지나서 난 학생들이 뭘 하고 노는지 한번 둘러봤다. 학생들은, 밖에서 말뚝박기를 하고 있었다.

“술 안먹고 뭐해요?”

“술이 다 떨어졌어요.”

난 학생들에게 미리 봐둔 조개구이 집으로 오라고 했다. 88명-예과 1, 2학년 전부-의 학생들에게 난 조개구이와 약간의 회, 그리고 술을 샀다. 그리고 난, 파산했다.


학생 대표가 내 방으로 찾아왔다. “선생님, 올해도 저희 조개구이 사주실 수 있나요?”

“그럼요.

방 안에서 책도 읽고, 내가 심심할까봐 따라와 준 조교 선생과 이야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대표가 왔다.

“선생님, 지금 저희 술 사주실 수 있어요?”

그때가 새벽 1시쯤, 하지만 자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90명이 넘는 학생이 조개구이집에 모였다. 조개구이와 회와 더불어 빈 소주병은 쌓여만 갔다. 피곤하다며 방에 머무른 조교 선생의 말에 따르면, 새벽 세시 쯤 내가 술에 취한 채 방에 들어오더니만 “x 만원 썼어요.”라고 한 뒤 잠이 들었단다. 그때 그은 카드 전표는 지금도 내 지갑 안에 보관되어 있는데, 그걸 갖고 다니는 이유는 내가 파산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우기 위함이다.  난 지금 가난하다.


후기: 조교 선생과 더불어 삼겹살에 소주로 저녁을 먹었다. 오는 길에 학생들이 갈만한 조개구이 집을 찾다가, 괜찮아 보이는 집에 가서 명함을 받아왔다. 새벽 한시에 전화를 걸었다. 자리 많다고, 빨리 오란다. 가보니까 그곳은 생각보다 좁았고, 다른 손님들 때문에 우리가 다 들어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 맞은편 집에 가야겠다 생각을 하고 학생들을 그리로 인도하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나오더니 이런다.

“다른 데 가셔도 저 집만은 가지 마세요. 우리 앞집이라 기분 나빠요.”

그런 마음이 드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한테 그렇게 말까지 하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난 학생 대표한테 말했다.

“저 집으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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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4-09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은..이런 비용을 어떻게 공금으로 충당하는 방법이 없나요....^^
마지막 `저 집으로 갑시다...'에 눌러야 할 껄 누르고 갑니다..^^

▶◀소굼 2006-04-09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학생들이 교수님 생각을 좀 해줬으면 좋겠네요..

라주미힌 2006-04-09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8명에게 먹인 술 값이면... 아프리카 난민 수백명을 살릴 수도 ^^;;
세상에.. 어쩌면 저의 일생동안 마시는 술값일수도 ^^;; 냐하하..
놀랬어요. 마태우스님의 통에...

Mephistopheles 2006-04-09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그때 그 숙제 배낀 학생도 사주셨나요...???
그런 친구들은 빼도 상관없을텐데 말이죠...

야클 2006-04-09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조개구이 사주실 수 있나요? =3=3=3

농담이구요.... 제가 사드릴게요. ^^

비자림 2006-04-09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저도 조개구이가 먹고 싶어요. ^^
호호, 정말 통이 크시군요.
저는 1년에 한두 번 반 아이들 아이스크림 쏘는 정도인데..

마늘빵 2006-04-09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그런 돈을. 엄청날텐데. 헉. 어떡하면 좋아. 혹시 연봉을 다 퍼부으신건 아닌지.

해적오리 2006-04-10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정말 쏘신거에요? 다른 교수님들은 안 가셨나요? 어찌 결혼도 안한 총각한테 그런 짐을 씌으실까...근데 이거 보니 조개구이 먹고싶다...

비로그인 2006-04-10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X 만원이 얼마일까 넘 궁금해요~ ^^
재벌2세가 파산할 정도라면 얼마...?

마태우스 2006-04-10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님/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ㅠㅠ
해적님/돈 걷어 주겠다든지 그런 댓글이 하나도 없어서 마음이 아픕니다ㅠㅠ
아프락사스님/결제일이 다가올수록 무서워집니다. 두근두근..
비자림님/아이스크림도 훌륭하죠!! 중요한 건 마음 아니겠어요? 그나저나 이게 전통으로 굳어져서 내년에도 사야할 것 같아요...ㅠㅠ
야클님/역시 님밖에 없어요 ^^
메피님/빼면 상처받지 않을까요..... 너그러이 봐 줍시다 우리.
라주미힌님/알라딘에서도 한번 그런 정도의 돈을 쓴 적이 있었지요 아마...큰손이라 돈 모으긴 글렀답니다
소굼님/한창 때라 그런 생각까진 못할 거예요^^
메피님/매번 추천해주신 덕분에 이번 주 30위 안에 들었답니다. 감사하빈다

하루(春) 2006-04-11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통으로 자리잡을 것 같은 예감이 불쑥~ 매년 4월이 되면 제가 먼저 벌벌 떨 것 같군요. ^^;

마태우스 2006-04-11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예리한 지적입니다. 내년에 잠깐 연수라도 갈까봐요 ^^

비로그인 2006-04-15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아까전 페이퍼에서 파산해가지고.. 산세베리아를 2만5천원짜리 샀다고 본거 같은데.. 이것 때문이군요..ㅎㅎ
"그리고 난 파산했다" 라는 문장에서 피식 했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