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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알랭 드 보통의 소설은 과연 소설이 무엇인지 의문을 품게 만든다. 소설의 줄거리는 무지하게 단순하지만, 그 단순함을 채워주는 건 작가의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이다. 우리나라 독자들 은, 물론 안그런 사람도 있지만, 뭔가를 배우고자 책을 읽는다. 읽고 나면 뿌듯하고 머리가 꽉 찬 느낌을 주고, 다른 데서 써먹을 만한 말을 머리에 많이 담을 수 있는 책을 선호한다는 얘기다. 그런 걸 가리켜 마광수는 ‘교양주의’라고 했는데, 그 말은 보수적인 시각을 담은 이문열의 책이 왜 그렇게 인기가 많은가를 잘 설명해 주었다. 책을 별로 안읽던 애였던 나도 이문열의 책만은 열심히 읽어댔고, 거기서 주워들은 말들을 미팅 자리에 나가서 떠들곤 했다. 내가 지금 대학생이라면 알랭 드 보통의 책에서 본 걸 여자와 만났을 때 써먹으리라.
이 책의 줄거리도 무지하게 단순하다. 앨리스란 여자가 에릭이란 남자를 만나서 겁나게 고생한 사연. 앨리스는 일에서는 성공했지만 사랑에서는 자신감이 없다. 반면 외견상 멋진 남자인 에릭은 자기 잘난 맛에 살 뿐 여자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려고 하지 않는다. 에릭의 만행 한가지. “이따 저녁 때 데리러 갈께요. 밥 같이 먹어요.” 이래 놓고서는 전화 연락조차 하지 않는다. 밤 10시가 되어 앨리스가 남자 집에 전화를 했더니 피자를 시키고 있다. 남자의 변명, “화내지 마요. 회사에서 동료들 일을 도왔어요.” 이게 말이 되냐? 바빴으면 전화라도 해야 될 게 아닌가. 앨리스가 아무 말 않자 이렇게 덧붙인다. “내가 꼭 저녁을 같이 먹겠다고 한 게 아니라, 시간이 되면 먹자고 한 거다.”
에릭의 만행이 쌓여갈수록 나 또한 에릭을 미워하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그 미움이 ‘신화’의 에릭에게까지 뻗칠 지경이었다. 스포일러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확 차버리지 왜 참고 사냐?’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소설을 읽던 나에게 마지막 결말은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하여간 지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은 좀 응징될 필요가 있고, 나처럼 매력없는 놈에게 그런 결말은 정말 매력적이다.
보통의 책을 이제 네권 읽었는데, 읽을수록 지겹기는커녕 더더욱 보통에게 빠져드는 나를 발견한다. 파트리샤 콘웰이 그랬고 아멜리 노통이 그랬던 것처럼, 한 서너권 쯤 읽고 나면 작가들 대부분에게 식상을 하게 마련인데 보통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내 기대를 충족시켜 주고 있다. 내게는 기쁜 사실 한가지. 아직 내가 안읽은 보통의 책이 아직 세권이나 남았다. 그럼 슬픈 소식은? 그거 다 읽고 나면 새로 번역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 그 전까지 보통에 필적할 만한 작가를 하나 찾는 게 내 목표다. 내 지인에 의하면 <수상한 식모들>이 재미있다는데, 그걸 한번 읽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