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3월 6일(월)
마신 양: 고량주--> 소주, 맛이 감.
9년, 내가 이 학교에 처음 발령을 받고난 그해, 난 교수 송년회의 사회를 맡게 되었다. ‘부담 가질 것 없이 한시간 정도만 끌어달라’는 그 말은 내게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 가만 있는 걸 좋아하는 분들이라 게임 같은 건 애당초 불가능했다. 그럼 뭘하지? 난 퀴즈쇼를 계획했다. 문화상품권 1만원짜리를 20장 준비해 각 문제를 맞힌 분께 드리고, 가장 많이 맞춘 분께는 비아그라를 드렸다. 토요일날 한나절을 끙끙대며 준비했던 그 송년회는, 내가 지금껏 본 사회 중 최고의 성공작이었다. 그때 들은 찬사는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이렇게 재미있는 망년회는 처음 본다.”
“돈 주고 부른 것보다 훨씬 낫다.”
그때부터 교수모임(우린 상조회라고 부른다)이 있을 때마다 내게 의뢰가 왔지만, 난 명성에 금이 갈까봐 사회보는 걸 회피했고, 상조회에 잘 가지도 않았다. 어쩌다 퀴즈 쇼를 한 적이 있긴 했지만, 난 그만큼의 정성을 쏟진 못했고, 반응도 그저 그랬던 것 같다.
지난주, 상조회장이 연락을 했다. 이번에 사회 좀 봐달라고, 자기가 회장인데 다들 뭐하는거냐, 너무 재미없다, 이러면서 야유를 해대는지라 이번에는 좀 재미있게 하고 싶단다. 저번에도 냉정하게 거절한 적이 있고, 그 미안함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라 그러겠다고 했다.
‘좋다. 이번엔 제대로 해보자!’
이탈리아전에서 ‘AGAIN 1966'을 구호로 내건 붉은 악마처럼 난 ’AGAIN 1999'를 머리 속에 그렸다. 버스를 타고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재미있는 문제들을 고안했고, 상조회 당일인 월요일날, 오후 12시 반부터 다섯시까지 파워포인트로 만들었다. 스페인에서 찍은 김밥 사진을 넣은 것을 비롯, 재미있게 하려고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우리 선생님들이 즐거워한 것도 기분좋은 일이지만, 중국집 종업원 분들까지 슬라이드 쇼를 보면서 웃었으니까. 기분이 들떠서 그런지 2차에 순순히 따라갔고, 늘 그렇듯이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난 연구실의 길다란 의자에 누워 있었다.
슬라이드를 만들면서 문득문득 회의가 들었다. 할 것도 많은데 난 왜 이러고 있을까? 이게 4시간 반을 바칠만한 가치가 있을까? 단지 30분 즐겁게 해주자고 이런 노력을 해야 할까? 왜 나만 이런 일을 할까? 하지만 모임이 성공적으로 끝난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다.
-4시간 반을 쏟아서 70명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반응이 좋으니 이렇게 기분이 좋지 않은가. 그것 역시 보람있는 일이다.
한가지. 난 스페인에서 산 색동옷을 입고 사회를 봤다. “이게 스페인에서 산 옷입니다!”고 자랑도 했다. 근데 아침에 사우나를 갔다오다 선생님 한분을 만났다. 그분의 말씀.
“스페인서 산 옷, 맨날 입나봐!”
그 옷, 앞으로 학교 갈 땐 안입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