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적 본 ‘킹콩’은 악의 화신 그 자체였다. 그는 타도해야 할 괴물이었고, 킹콩이 인간인 여자를 사랑하는 건 주제를 모르는 행위였다. 그랬던 킹콩이 피터 잭슨에 의해 다시 만들어졌고, 그는 괴기영화의 일종인 킹콩을 계급을 뛰어넘은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로 훌륭히 바꿔 놓았다. 원래 볼 생각은 없었지만 본 사람들의 한결같은 칭찬에 밀려 보게 되었는데, 역시나 보기를 잘했다. 세시간이 전혀 지겹지 않은 이 영화에 난 과감하게 별 다섯을 주련다. 줄거리를 나열하는 것밖에는 킹콩에서 받은 감동을 전달할 길이 없기에, 스포일러를 무릅쓰고 내용을 써본다.
[노비 신분인 킹콩은 대감마님의 부인을 감히 사랑했다. 남몰래 사모하는 것만으로는 욕망을 주체하기 힘들었던 킹콩은 어느날 부인을 납치하고, 그녀에게 극진히 함으로써 환심을 사려고 한다. 대감마님은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킹콩에게 자기를 헤칠 의사가 없다는 걸 알게 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신분상의 격차를 극복하긴 힘들었다. 미모가 뛰어난 그녀를 비싼 값에 팔려는 밀매꾼들의 도전을 킹콩은 온몸을 던져가며 막아내지만, 그녀는 결국 자기를 찾으러 온 남편과 함께 도망치고 만다.
결국 킹콩은 유부녀 납치 및 희롱죄로 감옥에 갇히고, 잔인한 형벌을 받는다. 그래도 자기를 사랑했던 사람인지라 그걸 보는 마님의 마음은 편하지가 않다. 게다가 남편이란 작자는 자기체면 때문에 자기와 사는 거지, 그 노비처럼 강렬하게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다. 구사일생으로 감옥을 탈출한 킹콩, 그는 뒤늦게 자기의 사랑을 받아들여준 마님에게 달려가고, 그녀와 더불어 한때나마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갖은 죄를 저지른 킹콩을 그냥 놔두는 것은 법질서로 보나 대감의 체면으로 보나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우리를 이대로 놔둬 달라는 마님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관군들이 쏜 화살은 킹콩의 가슴을 꿰뚫고, 킹콩은 서서히 죽어간다. 죽어가는 킹콩의 손을 꼭 잡아주는 마님, 그래서 킹콩은 죽는 순간이 외롭지는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일이 다 끝난 뒤 남편이란 작자가 달려오고, 둘은 껴안는다. 하지만 남자의 등에 감겨있는 여자의 손톱엔 날이 서 있다.]
전에 만들어진 몇편의 킹콩에 비해 유독 이 영화가 슬픈 건, 영화 속에서 킹콩과 여자간의 즐거운 시간을 영상으로 그려낸 덕분이다. 킹콩의 수줍은 모습과 여자의 오버하는 모습이 절묘하게 앙상블을 이룬 그 장면들은 두고두고 추억 속에 남을 것 같다. 피터잭슨,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