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우리집을 주 숙소로 삼기 시작한 건 올해 초부터다. 삐지는 일이 있거나 여동생의 애를 봐줄 때만 제외하곤 할머니는 늘 우리집에 계신다. 더 이상 혼자 힘으로 밥을 해드시거나 빨래를 하는 게 힘이 들어서다.


오늘, 엄마랑 일하는 아주머니 한분이랑 할머니 댁에 가서 대청소를 했다. 냉장고에서는 1년 이상 지난 반찬들이 곰팡이가 생긴 채 들어 있었고, 우리집에 공간이 없어서 가져다 놓은 짐들 때문에 집안은 어수선했다. 할머니의 반대를 무릅써가며 버릴 건 버리고 정리할 건 정리하는 게 오늘의 목표. 난 중국집에서 점심을 시켜드린 거 말고는 별로 한 일이 없었지만 나머지 분들은 무지 고생을 하셨다. 쓰레기가 봉투 4개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니.


집안을 치우다 목도리가 나왔다. 그 목도리, 할머니가 몇십년을 쓰신 거라 정겹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한 일주일쯤 전, 제수씨가 우리집에 왔었다. 여느 때처럼 제수씨는 부엌에서 일을 했고, 남동생은 TV를 보다가 집에 갔다. 갑자기 할머니가 목도리가 안보인다고 했다. 계절적으로 목도리가 필요한 때는 아니었지만 그건 그냥 이해하자. 문제는 할머니가 목도리를 가져간 범인으로 제수씨를 주목했다는 데 있었다.

“그것이 목도리를 보더니 탐을 내는 눈치더라고”

할머니는 당장 전화를 해보자고 난리가 아니었다.

“그렇게 오래된 걸 누가 가져간다고 그래요?”

“내 말이 그말이야. 왜 별로 좋지도 않은 것을 가져가?”

아무리 말해도 할머니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었고, 그 뒤에도 몇 번이나 목도리 얘기를 하면서 제수씨를 들먹였다. 그 목도리는 할머니 댁에 있었던 거다.


그보다 좀 전에, 백양사에서 식당을 하는 이모가 올라왔었다. 다른 일로 왔다 갔는데 이모가 간 뒤 할머니는 수십년 된 잠옷이 없어졌다고 하셨다.

“그게 일본서 산 잠옷인데 왜 그런 걸 가져간담?”

“아유, 그거 가져가라고 해도 안가져가요. 요즘 좋은 잠옷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럼 그게 어디로 갔단 말이야? 내가 봤어, 가져가는 거”

할머니의 성화에 엄마는 이모한테 전화를 해봤지만, 이모는 어이없이 웃을 뿐이었다.


치매는 이렇게, 남을 의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가보다. 오늘 일을 할 때도 할머니는 일하는 아주머니가 뭔가를 가져가지 않을까 감시했고, 그래서 쓰레기를 버리러 같이 가자고 했을 때도 아주머니를 지켜봐야 한다고 가지 않았다. 그 아주머니는 우리집에서 오랜 기간 일을 해온, 가족같은 분인데. “원래 안그러시던 분인데..”라는 내 말에 아주머니는 “그런 게 어딨냐. 젊으실 때도 좀 그러셨다”고 하셨지만, 내게 할머니는 언제나 인자하고 좋은 분이셨기에 “나이듦은 좋은 사람을 피곤한 사람으로 바꾼다”고 주장하련다. 할머니 연배까지 살 자신은 없어도 내게도 결국 노년은 찾아올 터, 그때 난 어떤 모습일지?


* 우리집 짐을 정리할 때 할머니는 우리가 쓰던 이불들을 버리지 못하게 했다.

“내가 우리집에 가져갈 껴!”

하지만 할머니는 오늘, 방 구석에 쌓인 이불들을 보면서 엄마한테 역정을 내신다.

“저런 걸 우리집에다 다 갖다놓으니 집이 엉망이지!”

치매는, 사람의 일관성마저 파괴한다. 무서운 병 치매여. 할머니한테서 어서 떨어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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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5-09-04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어서 죄송한데요. 그래도 할머님께서 정정하시니 다행입니다. 마태우스님같은 착한 손자분도 계시고. 어디선가 주워듣기로는 치매에는 한결같이 신경쓰고 관심가질 만한 무엇이 있으면 좀 낫다고 하던데.

파란여우 2005-09-04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알라딘 여기저기서 무거운 야그들만...

진주 2005-09-04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그러게요, 파란여우님...)
마태님, 지우개를 없애버리세요. 할머니 기억을 지우는 지우개요..

sooninara 2005-09-04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돌아가신 친정할머니가 치매셨는데..초기증세가 바로 저렇더군요.
무조건 남들 의심하기..ㅠ.ㅠ 할머님이 더 악화되시길 않으시길 바랍니다.

울보 2005-09-04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나요..마태님 저도 빌게요,,빨리 할머니에게서 떨어져버리라고요,,,

바람돌이 2005-09-05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픈 소식이네요. 할머님이 악화되시지 않기를 빌게요.

플라시보 2005-09-05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외할머니도 돌아가시기 전에 정신이 약간 희미하셨다고 하더라구요. 잘 잊어버리고 했던 말 또 하시고... 이런 모습 지켜보는게 자식들로썬 참 마음아픈 일이죠. 저도 님 할머님께 치매가 얼른 떨어져나가길 바라겠습니다.

싸이런스 2005-09-05 0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들면 자기를 콘트롤 하기 어려워지고 그러다 보니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남도 믿지 못하게 되나봅니다. 늙고 병든 몸으로 세상을 관대하게 응시할 수 있는 노후를 맞으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manheng 2005-09-05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외할어버지와 할머님이 비슷하신거 같아요... 얼마전에 몇년만에 할아버지를 뵈러 갔었는데.. (무심한 손녀ㅠㅠ) 할아버지가 계속 하셨던 이야기를 또 하시고 또하시고 또하시고...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ㅠㅠ

아영엄마 2005-09-05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부분에서 헛~ 하고 웃음이 나긴 했지만 남 이야기는 아니군요. 구순을 바라보시는 저희 외할머니도 치매기가 와서 주변 사람들을 황당하게 만들곤 하신다던데, 걱정입니다...

클리오 2005-09-05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나이들어가는가... 가 참 사람에게 쉽지 않은 문제인가봐요.. 휴..

마태우스 2005-09-05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대부분이 현재가 영원할 것처럼 생각을 하느라 나이든 뒤의 삶을 준비하지 않는 것 같아요...특히 교수들!
아영엄마님/그러게 말입니다. 어머님이 치매 고치는 약 있냐고 하는데 그런 게 있을까 싶어요
만헹님/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거, 그것도 참 마음아픈 일이죠. 그래도 의심보단 낫다는 생각이...
싸이런스님/으음, 어떤 준비가 필요하냐고 제게 물으시다니... 전 찰라주의자거든요. 어려운 말로 저스트 나우예요...
플라시보님/말씀 그렇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치매라는 게 한번 걸리면 끝장이라고 생각을 해서 좀 무서운데요.... 꼭 그렇진 않겠죠/
바람돌이님/네..........감사합니다.
울보님/그렇다고 우실 것까지야...
수니님/어머나 님도 그러셨군요... 어쩌나..
진주님/내 머리속의 지우개가 생각나요... 지우개를 없애면 된단 말이죠?
여우님/앗 이미지 바꾸셨군요. 그러게요. 진주님 어머님도 편찮으시다던데...
쥴님/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관심가질 만한 게 뭐가 있으려나.... 책은 꾸준히 읽으시는 것 같던데...

진주 2005-09-05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우리 엄마 말고, 우리 시어머님이 편찮으세요...속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