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8월 12일(금)

마신 양: 겁나게 많이, 결국 정신 잃음

누구와: 친구1와 시작--> 친구 2와 마무리


술을 얼마나 안마셨는지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고 있었다. 소주 한병에 맥주 다섯병이니 그렇게 안마신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난 하나도 술에 취하지 않았다. 갑자기 ‘그’가 생각났다. ‘뭐하니’라는 메시지를 날리자마자 응답이 왔고, 우리는 홍대앞 감자탕집에 들어갔다.


감자탕집에는 개 한 마리가 있었다. 모든 개는 벤지가 가졌던 귀염성과 충성심을 갖고 있고, 그래서 나로 하여금 벤지를 생각나게 한다. 감자탕에 붙어있는 고기를 식힌 후 녀석에게 주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녀석은 넙죽넙죽 잘 먹었다. 벤지는 평소엔 나밖에 모르지만, 어머님이 뭔가를 드실 때는 그 앞에서 알랑거렸다. 하지만 먹을만큼 먹고나면 엄마에게 짖어대며 자기가 마음까지 허락한 건 아니라는 걸 내게 증명하곤 했다. 녀석 역시 배가 어느 정도 부르자 홀연히 내 곁을 떠나 주인 곁으로 갔다.


다른 손님들이 개를 부른다. 온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개 참 예쁘네요”

주인이 우리에게 말한다.

“주워온 개에요. 누가 박스에 싸서 버렸더라고요. 우연히 발견해서 데려다 기르고 있어요”

버려진 개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그 안타까움은 내가 어떻게든 도움을 주는 게 어렵기 때문에 생긴 거다. 그래서 난 그런 개를 데려다 기르는 사람이 고마워 죽겠다. 주인이 갑자기 위대해 보였다.


감자탕 주인아주머니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 개는 박스에 갇힌 채 굶어 죽거나, 운좋게 탈출한다 해도 차에 치여 죽기 십상이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개들처럼 길거리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며 여생을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그때 그 개를 만났더라면 감자탕집 손님들이 예쁘다면서 머리를 쓰다듬지 않았겠지. 쓰다듬기는커녕 병이라도 옮을까 황급히 몸을 피했겠지.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유전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최근 읽은 책에서도 부모의 노력이 자식의 운명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단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사람과 개를 비교하는 게 말이 안되겠지만, 나쁜 주인을 만나 죽을 뻔했던 그 개의 운명은 감자탕 주인을 만남으로써 극적으로 바뀌었다. 사람을 경계하며 음식물을 찾아 헤매는 대신, 손님과 주인의 사랑을 받으며 꼬리를 치는 개가 되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유전이 중요해도 따스한 보살핌 역시 그만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거리의 범죄자가 된 사람들 중 부모의 사랑을 받았다면 운명이 바뀌었을 사람이 많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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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5-08-13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레기 모아 놓는 곳에 가면 개들이 단단히 묶인 봉투를 풀어 보려고 애쓰는 걸 보곤 합니다 생긴 건 분명히 누군가에게 키워졌을 애완견인데, 비루먹었다는 말이 딱 맞는 듯한 모습으로 쓰레기통 주변을 배회하는 걸 어제 보고, 먹고 있던 치즈빵을 잘라서 주고 왔어요 말 그대로 숨도 안 쉬고 허겁지겁 먹더라구요 오늘이야 내가 준 빵으로 버텼지만, 내일부터는 또 어떻게 살련지,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kleinsusun 2005-08-13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그 개가 좋은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길을 헤매다가 복날에 험한 일을 당했을 수도....감자탕 집에 입양되어서 정말 다행이예요.
버려진 개들을 키우는 할머니가 계시더군요. 개가 몇백마리가 되던데.... 남양주군에요.세상에는 고운 분들이 참 많네요. 그래도...아름다운 세상.

야클 2005-08-13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한 감자탕 주인 아주머니 복 많이 받으시길. 엄청 개 좋아하는 야클.

2005-08-13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05-08-13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마음에 감동하셔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드셨군요. 세상엔 여전히 좋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술일기입니다. 해장하셨나요? ^^

플라시보 2005-08-13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그렇지만 길을 가다가 보면 버려진 개들을 보게 됩니다. 초라한 몰골과 피골이 상접한 몸매... 한때는 분명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을텐데 잃어버린건지 아니면 자신들의 삶에서 밀어냈는지 모르겠지만 참 책임감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긴 낳은 자식도 어디다 버리는 사람들도 있는데 개 쯤이야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생명이 붙은거라면 그게 뭐가 되었건간에 처음 기르겠다고 생각을 했으면 혹은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라면 내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2005-08-13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5-08-13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많이 받는다고... 꼭 좋은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
흠.. 가정환경도 물론 중요하긴 한데, 스스로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느냐..
그것은 꼭 환경만의 영향은 아닌 것 같아요. 유전의 영향인가? -_-a
조금만 잘못 생각했다면 일탈했을지도 모르는 과거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 어머니의 사랑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자신에 대한 신뢰
믿음 책임 신념 을 지키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행복한 가정에서..
아무 걱정없이 부족함없이 자란 사람들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해야했기에.. 좋은 것도
많았어요. 비슷한 상황에.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또 배려하려
노력했던 적도 많은 것 같은데.. 아직도 좀 부족하기는 하지만..서도. 하여튼 전...
사람은 부족함을 느낄 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다는 주의라. 부모의
영향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해요. ^-^

2005-08-13 1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꼬마요정 2005-08-13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집도 버려진 고양이들을 데려다 키웠답니다. 앞집이 거의 판자촌 수준이라 고양이들이 많이 서식했었는데, 철거되는 바람에 그 고양이들이 갈 데가 없어졌었거든요.. 그 중에 암코양이 한 마리가 새끼 두 마리를 집 앞에 떡 하니 낳아 기르길래 낼름 데려다 3마리 키웠죠... 그런거야말로 진정한 방생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신문에 나오신 거 봤어요~~^^ 이제는 거의 스타가 다 되셨는걸요~~^*^

2005-08-14 0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