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8월 7일(일)
누구와: 당연히 미녀랑
마신 양: 소주 한병 반?
난 여자가 담배 피우는 것에 별로 개의치 않는 편이다 (내 아내라고 해도 이건 마찬가지다). 사회적 시선 탓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그녀들은 흡연예절을 지키며, 공공장소에서 안피우는 등 되도록 다른 이에게 피해를 안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여성흡연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그리 곱지 않은 탓에, 여자들이 맘 편히 담배를 못살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남자 담배를 사주는 건 죽어도 안하지만, 여자를 위해 담배를 사다주는 건 그래서 부끄러운 게 아니며, 당연히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왕이면 그녀가 무슨 담배를 피우는지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 정리를 해본다.
1. 에세
큰 키에 긴다리를 지닌 8등신 미녀 S, 자신과 비슷하게 얇고 가는 에세를 피운다. 술을 먹는 중 담배가 떨어졌다기에 부리나케 슈퍼에 가서 미리 봐둔 에세를 4갑 사왔다. 하지만 그녀는.
“어머, 난 빨간 거 피워!”
빠른 발을 이용해 잽싸게 바꿔 왔는데, 담배의 메이커만 보지 말고 색깔도 중요하다는 교훈을 그때 얻었다. 참고로 에세는 ‘그녀들’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란다.
2. RAISON
나와 몇 번 배드민턴을 쳤던 미녀 S, 담배 피우는 모습도 참 귀엽다. 그런 S에게 아담하게 생긴 RAISON은 잘 어울린다. 고백하자면 난 이 담배를 학교에서 배운대로 ‘라이손’이라고 불러 왔다. 그런데 언젠가 그녀가 있는 술자리로 가는 도중 그녀의 전화를 받았는데, 담배 한갑만 사다 달란다. 그녀의 육성고백이다.
“레종 좀 사다주세요. 파란색으로”
그렇다. 그 담배는 라이손이 아니라 레종이었다.
3. 타임
어린 나이에도 올바른 사고를 가져 날 부끄럽게 만들었던 D는 ‘영원한 시간’을 뜻하는 타임을 피운다(timeless time이 원래 이름이다). 언젠가 그녀를 만나 술을 마실 때, 화끈한 D는 이렇게 말했다.
“오빠, 저녁 먹지 말고 곧바로 맥주 마시죠!”
내가 죽어라고 마신 맥주의 양만큼 D는 타임 담배를 피워댔다. 그녀의 어여쁜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타임의 뿌연 담배연기도 같이 생각나 신비스러움을 더해준다. 그러고보니 그녀를 못본지 꽤 됐다.
4. 라일락 맨솔
난 말을 거칠게 하는 여자를 좋아한다. 대화 중간중간 여자가 ‘졸라’같은 말이라도 한마디 하면 기분이 짜릿해진다(변태 아닐까...). 내가 C를 좋아하는 건 그녀가 말과 글, 그리고 행동이 혼연일체가 되어 자신의 당당함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C가 피우는 담배는 라일락 맨솔, 그러고보니 C의 헤어 스타일은 라일락을 닮았다. 자신이 선호하는 담배에 대한 C의 설명이다.
“길이가 길어 맨솔인데, 화-- 하고 시원한 느낌도 다른 맨솔에 비해 약하면서 좀 독해”
날 시원하게 해주는 그녀가 시원한 느낌이 약한 담배를 선호하는 건 좀 아이러니하다. 자신이 충분히 시원하기 때문일까?
5. 타임 라이트
<스텔스>를 같이 본 미녀 J는 타임라이트를 피운다. 잔정이 많고 부드러운 성격의 J는 다른 담배에 비해 ‘부드럽고 순하다’는, 하늘색을 띄는 ‘타임 라이트’와 잘 어울린다. 담배를 입에 물고 젊었을 때 겪은 아픔을 얘기하는 J, 내가 그 아픔을 마치 나의 것인 양 느끼게 된 건 타임 라이트의 연기 덕분이 아닐까.
6. 말보로 울트라라이트
말보로의 뜻은 정설이 없다. 남자는 흘러간 로맨스 때문에 항상 사랑을 기억한다는 ‘Man Always Remember Love Because Of Romance Over의 약자라고도 하고, 말론 브란도가 피우던 거라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하는데(후자의 주장은 나만 하는 거다),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에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어제 술을 같이 마신 P 역시 한미모 하는 인물인데, 영화 주인공이 레드를 피우는 데 반해 P는 울트라라이트를 선호한다. 독성이 약한 울트라라이트, 그 담배의 회색은 거ㅡ녀 내면에 간직한 어린시절의 상처를 대변해 주는 듯하다. 참고로 P는 “여자가 담배를 사려면 눈치가 보여서 그래”라고 내게 말해줌으로써 여성들에게 기꺼이 담배를 사주게 해준 장본인이다.
여자친구와 있는데 그녀의 담배가 떨어질 즈음, 가방 속에서 그녀가 피우는 담배를 짠 하고 꺼내준다면 점수를 따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