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사 성실하고 성적도 우수한 학생입니다. 장학금을 주신다면..”
예과 학생들의 장학금 신청서에 추천사를 써야 했다. 장학금이란 게 사실 성적순으로 지급되는지라 내가 추천사를 어떻게 쓰던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더욱이 신청을 한 학생이 스무명이 넘고, 개개인을 잘 모르는 처지인지라 그냥 무난한 문구를 골라잡아 똑같이 쓰는 게 상례였다. 하지만 내게는 “똑같은 말을 두명에게 해서는 안된다”는 이상한 원칙이 있었다. 그래서.
-올바른 의사상에 대해 확고부동한 신념을 가진, 장차 우리 의학계를 이끌 학생입니다(그 학생의 의사상이 어떤지 사실은 모른다).
-타인에 대해 배려가 깊고 교우관계도 원만하며...(내 생각이다)
-인간과 자연을 사랑하며, 어려운 여건에서도 공부 잘하는 학생입니다 (앞부분, 어느 책에서 읽었던 문구다)
이런 식으로 스무개가 넘는 추천서를 써내려가다보니, 과거 내가 학위를 딸 때 생각이 났다. 박사논문이 통과되면 ‘xx 혜존’ ‘ss 님께 드립니다’같은 문구를 써서 논문을 증정한다. 하지만 특별한 이변이 없다면 그 논문을 들춰보는 사람은 없다. 학술지에 게재하기 위한 걸 제외하면, 나 역시 다른 이의 논문을 읽은 적이 없다. 그 논문은 그 자신에게만 중요할 뿐, 다른 이에게는 그만한 가치를 주지 못하니까. 예컨대 박사학위를 받은 공대 친구의 논문을 내가 읽어서 무엇하겠는가. 그래서 난 그래도 한페이지쯤은 읽을 걸 만들고 싶었다.
논문에는 반드시 감사의 글이 들어간다. “이 논문이 나오기까지 도와주신 xxx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사랑하는 아내와 딸 미정이에게도 감사드린다”
뭐 이딴 식의 글 말이다. 이거, 난 남들처럼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난 그 페이지를 백지 상태로 비워 두었고, 주는 사람마다 일일이 A4 종이에 써가지고 붙여서 줬다. 거의 한페이지에 달하는 편지를 일일이 쓴 거다. 물론 곧 후회를 하긴 했다. 삼십명이 넘는 사람에게 쓰려니 시간이 너무나도 많이 걸렸으니까. 내가 논문을 그렇게 열심히 썼다면 논문 심사 때 그렇게 혼나지 않았을텐데, 나의 관심은 그런 이상한 곳에만 머물러 있었다.
장학금 신청서를 쓰는 걸 보니까 그때의 내 모습이 생각났다. 석사 논문을 쓸 때는 “박사 논문은 훌륭하게 써야지”라고 하고, 박사 논문을 쓸 때는 “박사 딴 뒤가 중요하지!”라고, 지금은 “두고 봐. 언젠가는 내가 대박 논문 하나 쓸거야!”라고 하면서 살아가는 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장학금 추천서에 목을 매는 자신을 바라보니, 내가 왜 이렇게 지지부진한 삶을 사는지 이해가 간다. 난, 별 의미없는 학위논문을 쓸 그때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