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늘 젊은 애들한테 하는 말, “술 많이 마시지 마. 뭐 좋다고 먹냐? 주 3회 정도만 마셔!”

사실 이건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아무리 머리를 써도 주3회 이하로 먹는 건 넘지 못할 벽이었다. 하지만 지난주부터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술 한잔 하자!”고 꼬시면 “나 이번주 약속 다 찼어!”라고 거짓말을 해대는 중이다.


그러다보니 밤에 맑은 정신으로 지내게 되고, 정신이 맑으니 올바른 생각이 들기 시작, 가끔씩 어머니와 할머니를 모시고 여의도 고수부지에 간다. 심심하기도 하고, 밤에도 기온이 떨어지지 않아 고생하던 할머니는 여의도에 가시면 정말 좋아하신다. 어머니는 운동을 하고, 나랑 할머니는 돗자리에 누워 얘기를 나눈다.

“저게 63빌딩인 거 아세요?”

“그렇다냐? 굉장히 높다..”


가끔씩 이상한 걸 배워가지고 오는 우리 어머니는, “뒤로 걷는 게 몸에 좋대”라며 뒤로 걸으신다. 1월 초, 목욕탕에서 넘어져 팔이 부러지는 바람에 근 석달을 고생하신 터라, 저러다 넘어지면 어쩌나 싶다. 제발 앞으로 걸으라고 얘기해도 어머니는 막무가내다. 도대체 누굴까. 뒤로 걷는 게 좋다고 귀 얇은 어머니를 충동질한 사람이.


할머니는 가끔씩 지난 세월을 회상하신다. 그런데 놀랍게도 할머니의 회상에는 즐거운 기억이 없다. 그러니까 할머니의 회상은 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 혹은 탄압의 기억에 맞춰져 있다. 어제 해주신 얘기.

“할아버지가 여자 있는 술집에서 술을 마신다고 누가 알려줬어. 같이 가보자고 하기에 따라갔지. 그 사람이 들어가서 내가 왔다고 하니까, 할아버지가 소리를 지르는 거야. 여편네가 어디 술집에 얼씬거려? 붙잡히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릴거야!”

그 말에 놀란 할머니, 걸음아 날 살려라 달린 끝에 집에 오셨다. 곧이어 할아버지가 들이닥쳤다.

“당신 지금 어디 갔다왔소?”
“아니오. 계속 여기 있었는데요”

“그럼 그렇지. 누가 괜한 소리를 했네”


어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가산의 대부분을 여자 있는 술집에서 탕진하셨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술집에 갈 때마다 할머니가 못가게 말렸어. 어차피 갈건데 왜 말렸을까. 그러면 할아버지는 할머니 따귀를 사정없이 때렸지. 내가 그러지 말라고 해도 소용이 없어”

내가 어느 정도 세상을 알게 되었던 1970년대 말, 그땐 할아버지가 이미 환갑을 넘은 후였다. 늘 집에 앉아 TV만 보시던 할아버지의 모습 뒤에는 주색잡기로 할머니 속을 썩힌 젊은 시절이 있었던 거다. 그 시절에 얻은 병이 할머니에게 전파되는 바람에 할머니는 어머니 한분밖에 낳지 못했다는 얘기는 일전에 들었었다. 그렇게 고생만 시키던 할아버지가 나이들어 쓰러지자 할머니는 간병인을 쓰자는 우리의 요구를 한사코 거절해 가면서 일년 이상을 혼자간병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나는 모른다. 미운정이라는 것도 쌓이면 그렇게 되는 걸까.


아무리 뒤져봐도 할머니의 결혼 생활에는 즐거움이라는 게 없었다. 그 나날을 어찌 견디셨는지 신기해하려다가, 요즘도 우리에게 헌신적이기만 한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가 안가는 것도 아니다. 김치 하나에다만 밥을 드시고, 당신보다 늘 우리를 생각하신 할머니, 우리가 아무리 “장조림도 좀 드세요!”라고 얘기해도 할머니에겐 마이동풍이다. 할머니는 이미 스스로를 존중하는 법을 잃어버렸고, 남은 여생도 그렇게 사시는 게 편할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이야기를 해주시는 와중에 다정하게 손을 잡은 남녀가 걸어간다. 지금 시절의 젊은이들에게 할머니 시대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이해 불가능한 낡은 것들이리라.

“너도 저렇게 애인도 사귀고 그래라. 어서 결혼해야지!”

할머니의 말에 난 이렇게 반박했다.

“피, 할머니 결혼생활 얘기 들으면 결혼이란 건 재미 하나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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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라겐 2005-07-22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그렇게 살았지만 너는 안그러고 살면 되잖니.. 살아봐라.. 얼마나 재밌나...
뒤이어 지는 할머니 말씀^^

바람돌이 2005-07-22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렇게 살아왔던게 대부분의 할머니들 어머니들의 삶이었죠. 남들도 다 그렇게 살리라 생각하면서.... 제 친정어머니 같애요. 약간 다른건 늘그막에 요즘 친정어머니가 권리주장을 시작했다는 것만 빼고요.

비로그인 2005-07-22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마태우스님. 어쩜 그렇게 귀여운 손자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십니까? ^-^
보기 참 좋은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저도 어머니 보시고 고수부지 함 가야하는데.
근데, 부리님이 마태우스님이세요? 왠지 그럴것 같네요. 컥. 완전 속았네 -0-;

비로그인 2005-07-22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맑은 마음 고운 세상, 무슨 표어같네요. 술안먹어도 맨정신이 안돌아오는 저는 어쩌면 좋스무니까잉~^^

클리오 2005-07-22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도란도란 다정한 모습이예요.... 히~ ^^

로드무비 2005-07-22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씩 이상한 걸 배워가지고 오는 우리 어머니는...
전 이런 대목에서 자지러집니다.
뒤로 걸으시는 마태우스 어머님이 너무 귀여우세요.ㅋㅋ
그런데 다 읽고 나니 조금 슬퍼지네요, 뭔지.

moonnight 2005-07-22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이 계셔서 할머님이 너무 행복하시겠어요. ^^

水巖 2005-07-23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번째이겠지만 축하합니다.

페이퍼의 달인

참이슬이 있는 서재
닉네임 : 마태우스(mail), 페이퍼 지수 : 28875

이제 저 혼자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하지만...그게 아니더군요. 제 곁에는 님들이 있었어요. 그걸 알고나니 세상이 조금은 덜 무섭게 느껴집니다. 늘 감사합니다, 알라딘 여러분.


2005-07-23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즈마리 2005-07-23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멋진 마태님이 왜 아직 장가를 안 가셨을까...정말 의문투성입니다. ^^
저 열혈 팬 되버렸어요. 맑은 정신일 때가 더 좋은 거 같아요..^^ ㅋ

마태우스 2005-07-24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흑, 저도 맑은 정신이 더 좋은데요, 그게 잘 안되요 엉엉 왜 전 인기가 많은 걸까요..
속삭이신 분/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
아이고 수암님/감사합니다. 저리 멋진 걸 캡쳐해 주시고^^
문나이트님/헤헤헤... 부끄러워요!
무비님/그죠? 원래 제 컨셉이 웃음 속의 애환이어요!!
클리오님/앞으로 할머니랑 여의도에 갈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게 달렸지만^^
별사탕님/사실 맑은 정신보다는 올바른 정신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님은 그런 면에서 존경받아야 합니다.
가시장미님/부리와 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바람돌이님/조금씩이나마 시대가 좋은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게 희망을 주네요
인터라겐님/쪽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