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반이 30명이었는데요, 그 중 20명이 여학생이었어요”

“와, 그럼 고등학교 때 학교 다닐 맛이 났겠어요”

다른 일로 날 찾아온 학생의 말을 들으면서 난 부러움에 입을 쩍 벌렸다.


나 때만 하더라도 남녀공학은 몇몇 운좋은 학생들의 전유물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중 내가 기억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공부만이 살길이라는 지긋지긋한 주문, 우리반 애들을 협박했던 깡패들, 싸웠다는 이유로 애들을 발로 밟는 폭력교사, 존재만으로도 공포심을 갖게 만드는 교련교사(별명이 ‘피받아’였다), 어느 것 하나 긍정적인 게 없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시절을 견뎠을까 할 정도로 지겨웠던 나날들, 당연한 말이지만 억만금을 준다해도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마음은 없다. 하지만 내가 남녀공학을 나왔었다면?


그랬다면 필경 아름다운 추억이 많이 있었을 거다. 이렇다할 재미가 없던 초등학교 시절이 선녀같던 내 짝궁, 그리고 내가 좋아했던 어여쁜 여학생들로 인해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처럼. 여학생들에게 잘보이려고 공부를 열심히 했을지 모르고, 잘 하면 그 중 하나와 커플이 되어 남들의 부러움을 샀을지 모른다. 발렌타인 데이 날 한심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대신, 내게 쵸코렛을 줄 여인을 만나러 꽃단장을 하고 있었을지도. 이 모든 것보다, 여자들을 대하는 내 태도가 지금처럼 어색하지 않았을 거라는 게 가장 아쉬운 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여자가 두렵다. 여자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남자를 보면 부러워 죽겠다. 여자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편하게 농담을 주고받는 건 적어도 나한테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모든 것이 여성과 격리되어 생활한 그 6년 동안에 배태된 게 아닐까.


따지고보면 나이든 사람들 중에 유난히 마초가 많은 이유도 남녀칠세부동석의 낡은 원칙 때문일 수 있다. 남자들끼리 모여서 맨날 하는 얘기가 누가 누굴 따먹었느니 하는 얘기고, 그들끼리 돌려보는 게 고작 포르노나 그에 준하는 만화.소설들, 그러는 동안 여자는 정복의 대상이 되고, 우리와 더불어 사는 친구가 되지 못했다. 남녀공학의 혜택을 받은 요즘 20대가 적어도 우리 세대보단 남녀평등을 더 잘 실천하고 있는 것같아 보이는 이유도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격리보단 공존 속에서 배우는 게 훨씬 더 많다는 걸 입증해 주는 게 아닐까.


초등학교, 중학교 때 공부를 탁월하게 잘하던 친구 하나가 몇 안되는 남녀공학인 이대부고에 갔다. 난 걔가 부러워 죽겠었는데, 걔는 “공부 잘하긴 틀렸다”면서 세상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 가서도 여전히 공부를 잘 했고, 멋진 외모로 여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 여학생 중 하나가 미스코리아 김성령이었다). 3년 후 그는 서울대에 갔고, 지금은 한양대의 실력있는 교수다. 이거 가지고 우기긴 뭐하지만, 남녀공학이 공부에 지장을 초래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녀공학이란 전제라면 난 다시금 10대 시절로 돌아가도 괜찮다. 제 아무리 입시지옥에 시달릴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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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07-12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우님/지금 정도로 여자 분들과 얘기할 수 있기까지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구요! 글구 마지막 문장은 당근 진심이죠! 젊음과 추억을 동시에 갖는 건데요 머.

마늘빵 2005-07-12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남녀공학에 못갔는데... ㅠ_ㅠ 다시 돌아가고파요. 주변에 대체 여성들이 없어요. 아는 여성이 있어야 연줄연줄 해서 만나고 할텐데 아예 없으니. 쩝.

마태우스 2005-07-12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앗 님도 연배가 좀 되십니까??? 하여간 안타깝네요... 남녀분리는 사실 야만이라고 생각해요

엔리꼬 2005-07-12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높은 언덕위의 정신병동같은 빨간 벽돌건물에 수용되었던 고등학교 시절, 철조망을 부여잡고 언덕 아래 평지에 자리잡은 하얗디 하얀 여고 건물을 바라보며 애꿎은 담배만 뻑뻑 펴대던 기억이 나네요... 돌리도, 나의 피같은 6년을...

물만두 2005-07-12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아갈 수 있는 약이라도 구해야지 원... 불쌍모드로... 사실 다녀보면 별거 아닐텐데요...

클리오 2005-07-12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람 나름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리고 절.대.로.... 고등학교 시절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남녀공학 학교에도 입시지옥과 깡패와 끔찍한 선생은 있다니까요... ^^

마늘빵 2005-07-12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전 연배라고 할 만한 나이는 아닌데요. 풉. ^^ 저 알라딘에서 어립니다. ㅋㅋ

비로그인 2005-07-12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중학교 까지는 남녀공학이었는데요,
지금도 그때 친구들 하고 연락을 가끔 한답니다.
제 기억로는 재밌는 일도 많고, 그랬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대학교가 금남의 구역이라 그게 문제였었죠 -_-;

be mo wise 2005-07-12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고2때 반에 33명 있었는데 그중에 남자가 10명이라 우리반은 축구를 못했답니다.
그리고 고3때는 40명 있었는데 그중에 남자가 13명이었는데...
2명은 축구를 겁나게 못해서, 1명이라도 삐끗하면 10명이서 축구를 했답니다..허허
부러우신가요 ㅎㅎ

갈대 2005-07-12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남고 나왔어요. 지내보니 남여가 섞여야 좋은 것 같습니다. 남자보다 여자 비율이 더 높으면 더 좋구요^^;;

수퍼겜보이 2005-07-12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만이 살길이라는 지긋지긋한 주문, 우리반 애들을 협박했던 깡패들, 싸웠다는 이유로 애들을 발로 밟는 폭력교사, 존재만으로도 공포심을 갖게 만드는 교련교사(별명이 ‘피받아’였다), 어느 것 하나 긍정적인 게 없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시절을 견뎠을까 할 정도로 지겨웠던 나날들, 당연한 말이지만 억만금을 준다해도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마음은 없다." ---> 저도저도요. 여고도 똑같아요. 남녀공학은 다를라나?

마태우스 2005-07-13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흰돌님/여고도 똑같습니까?? 제가 그렇게 예쁘게 본 여학생들 중 깡패가 있답니까? 음 어쨌든 전 남녀공학에 대해 환상이 있어요. 다녀본 분들은 남녀공학도 다를 게 없다고 하지만요...
갈대님/당근이죠 남자보다 여자 비율이 높아야죠, 그렇죠?^^
비모와이즈님/남자가 10명에 여자 23명..와, 정말 환상적이네요. 고3 때는 더더욱... 겁나게 부럽습니다! 일일학생 체험, 이런 거 하고 싶네요
고양이님/아무리 힘든 상황이라 해도 남녀가 같이 이겨나가면 못할 게 없을 것 같아요! 대학이 금남이면... 그래도 그땐 자유롭게 연애도 할 수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새벽별님/그래요, 사실 다시 가면 숨막혀죽을지 모르죠. 그래도 그 시절을 이겨낼 추억 한자락이 남고에는 없답니다. 친구들이 있긴 해도....아름다운 로맨스의 기억이 탐나네요
아프락사스님/서른인 누나가 있다,는 대목에서 님의 젊음을 뒤늦게 간파했답니다. 죄송합니다
클리오님/그렇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남자중고등학교는 제게서 너무도 큰 걸 빼앗어갔다는 생각에 뒤늦게 분해하고 있는 거죠
물만두님/지금 다니는 애들은 당연한 걸로 생각하고 그 가치를 모르겠지요..
서림님/님도 저랑 같이 일일 학생 체험이라도 해요. 아니다...님은 잘생겼잖아요. 갈대님이랑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