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실서 일하는 조교를 만났다. 갑자기 생각난 듯 내가 물었다.

올해 몇이죠? 서른이요. 와, 벌써 그렇게 됐군요. 저 처음 본 게 아마 99년이죠? 그땐 몇 살이었어요? 스물넷이요.


내가 이 학교에 온 햇수만큼 그녀는 실험실에 있었다. “선생님같이 날씬한 분은 처음 봤어요”라고 말했던 그녀는 내가 그녀를 처음 봤을때와 똑같이 빼빼 말랐다. 그 가느다란 다리로 어떻게 걸어다니는지 신기할 정도. 그녀는, 꽃다운 20대 청춘을 각종 시약과 씨름하면서 보내야 했다.


남자친구 있던가요? 헤어졌어요. 아, 네...


실험실에 있으면 결혼이란 걸 하는 게 쉽지 않다. 남자를 만날 기회가 별로 많지 않기 때문이다. 실험실이 아무리 넓다해도, 실험실은 좁은 곳이다. 한정된 몇 명 이외에는 드나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담당 교수와 동료 남자조교, 그리고 이따금씩 같이 밥을 먹는 나. 담당교수는 애가 있고, 동료 남자는 그녀를 “여자로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출퇴근을 하다가 왕자를 만나지 않는 이상, 그녀가 남자를 만날 기회는 정말 없다.


시약 팔러다니는 사람이 있긴 하다. 양복을 깨끗하게 다려입은, 영업직원 특유의 모습으로 학교를 누비는 사람들.

xx 시약회사 남자 어때요? 그 사람 잘생겼지 않아요?

그 사람이 뭐가 잘생겨요? 그리고 그사람, 작년에 결혼 했어요.


이건 비단 우리학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내가 모교에 있을 때, 실험실에 있던 여자애들 중 결혼을 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네들의 미모가 떨어지냐면 그런 것도 아니다. 넓은 세상으로 나간다면 얼마든지, 남자들의 구애를 받을 만한 사람들이다. 실제로 나와 같이 일했던 테크니션 하나는 모 병원에 취직하자마자 결혼을 해서 잘 살고 있고, 또다른 여자애도 이동통신 회사에 일자리를 구한 뒤 얼마 안되서 결혼했다. 올해 서른인 우리학교의 그녀 역시 주변에 남자만 많다면,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절규할 남자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텐데.


실험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복지는 열악한 편이다. 봉급도 적지만 각종 보험의 혜택에서 제외되는 비정규직이다. 그러니 실험실 사고가 난다해도 보상을 받을 수 없다. 아무리 오래 일해도 추천서 이외에는 자신의 경력을 증명할 길이 없다.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더 나쁜 것은 연애를 할 기회가 없다는 것.


90년 이후, 연구자들이 해외에 논문을 내는 경우가 크게 늘었다. 그렇게 신장된 연구 여건덕에 황우석 박사의 대박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 밑에는 청춘을 반납한 채 열심히 일하는 연구원들이 있다. 봉급과 복지가 교수 재량으로 해결될 수 없다면, 미팅 정도는 시켜 주는 게 교수의 도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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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둥개 2005-06-27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결론이 너무너무 재미있어요. 마태우스 선생님께서는 그러니까 도리를 다하시고 계신 거지요? (사실은 비슷한 이유로--실험실의 위험성과 연애기회의 희박함--때문에 진로를 바꾸던 친구 생각이 나서 감동적으로 읽었답니다. 그 친구는 시집 잘가서 신랑과 아이와 행복하게 살고 있죠. 그러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은 지우기가 어렵다고 해요 :-)

oldhand 2005-06-27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론 부분에서 탄복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역시 훌륭한 스승님의 자세를 갖고 계신 마태 님.
(아 그리고, 제가 뒤늦게 마태님의 퀴즈를 봤습니다. 저도 한 문제 추가로 냈으니 와서 풀어주세요. ^^)

숨은아이 2005-06-27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히 도리를... ㅎㅎㅎ (그런데 비정규직도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해요. 가장 위험한 일을 시키면서 산재보험도 안 들어주다니... 나빠!)

날개 2005-06-27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경합니다... 미팅 상대는 생각해 놓으셨는지요....^^

moonnight 2005-06-27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후배 한 명은 실험실 조교와 결혼했답니다. 원래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했지만 본과다니면서 다시 만났고 수련하면서 계속 들락거리더니만 결혼하더군요. 이렇게 인연을 찾은 케이스도 있지만, 흔하진 않겠죠.;; 연애를 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 가장 나쁘단 말씀에 웃으며.. 마태우스님은 훌륭한 교수님이겠죠? ^^

marine 2005-06-27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마태우스님의 결론은 최고입니다 ^^ 제 친구도 약대 대학원에 갔는데 2년 동안 남의 실험만 해 주다가 (대학원 등록만 하고 실제로는 안 나오는 사람들) 결국 박사는 포기하고 일반 약국으로 들어갔어요 2년 동안 아침 8시까지 출근, 11시 퇴근이었는데 참 안쓰럽더라구요

클리오 2005-06-27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그 친구 미팅 시켜줬다는 후기가 안올라오면 마태님의 인간성이 의심당할 우려가 있습니다. ㅋㅋ~

아영엄마 2005-06-27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결론입니다. ^^ 대인관계가 넓으신 님이 미팅 주선 함 해주세요!!

maverick 2005-06-27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지 최근에 본 글 중에 가장 명쾌하고 현실적이고 빤타스틱한 결론입니다!

2005-06-27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5-06-27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버릭님/아,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네요... 좋은 글을 써야 님을 뵐 수가 있군요^^
아영엄마님/저야 뭐...하핫. 아시죠 제맘?
크, 클리오님/그, 그게 말입니다.... 제가 지금 물색 중입니다. 저 믿으시죠?
나나님/아이 부끄럽습니다.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좀 빈약하지 않았나 싶었는데....
문나이트님/점점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그 조교선생을 저라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갑자기 무럭무럭...
나, 날개님/님마저.... 이를 어째...
숨은아이님/보험 자격 인정되어야 한다고 제가 글도 쓰고 그랬었는데, 안되더이다. 좀 열악하죠...
올드핸드님/틀렸을까봐 무서워서 못가겠습니다. 그래도 가긴 가야겠죠? 님의 통계학적 지식이 그리 뛰어난줄 몰랐어요. 옛날에 제가 좀 약한데.... 글구 칭찬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새벽별님/댓글 달다보니 뻔뻔스러워졌답니다. 음, 우리 같이 책임지도록 해요!!
검정개님/실험하는 분들은 어디나 마찬가지군요. 주위에 그런 분이 몇분씩 계시나봐요... 아,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군요..
속삭이신 분/그래도 단체미팅 같은 것도 들어오고, 선망의 대상이 되는 등 장점도 있지 않나요? 실험실보단 훨씬 나을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