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일어났던 단편적인 일들, 그러니까 페이퍼로 올리기에는 좀 소소한 사건들을 한데 모아서 정리해 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왜? 오늘 순위를 보니 내가 29위라서(참고로 서재 달인에 순위 표시해 달라는 제안, 내가 했다. 음하하하)


1. 착한 일

-테니스를 치고 와서 할머니에게 용돈 5만원을 드렸다. “테니스 대회에서 1등해서 상금 탔어요!”라고 말을 했지만, 프로 대회가 아닌 이상 상품을 현금으로 주는 곳은 없다. 게다가 그날은 대회도 아니었고, 친구들끼리 편먹고 친 거였으며, 전적은 1승 3패였다. 할머니는 내가 힘들게 번 돈이라며 소중히 쓰시겠다고 하셨다.


2. 후회되는 일

오늘 아침, 인기척에 놀라 잠을 깼다. 새벽 다섯시를 막 지난 시각, 할머니가 내 옆에 서 계시고 벤지는 짜증나는 표정으로 서있다. 사태를 능히 짐작할 만했다. 할머니는 벤지가 깔고 있는 이불을 빼앗아서 나한테 덮어주신 것. 내가 깬 건 괜찮지만 벤지를 깨운 데서 짜증이 확 났다. 안그래도 늘 잠이 부족한 벤지인데.

“할머니! 왜 벤지를 깨우고 그래요!!”

이렇게 소리를 질렀더니 할머니는 삐지신 듯, 슬픈 표정을 짓고는 방으로 가신다. 아, 내가 너무했다 싶다. 할머니는 내 생각을 하셔서 그런 건데.


3. 이해가 잘 안가는 일

내가 집에 있을 때, 벤지는 내 그림자다. 컴퓨터를 치는 동안 벤지는 당연히 내 옆에서 잠을 잤고, 그런 벤지를 위해 난 벤지 물그릇을 방에 갖다 놓았다. 컴 방에 들어왔다 나가시던 할머니가 그만 물그릇을 발로 찬다. 벤지 물그릇인 걸 아신 할머니의 말씀, 열나게 자고 있는 벤지를 향해 “이런 망한 놈!”

아니 도대체 벤지가 무슨 잘못을?


4. 가슴이 찢어지는 일

그저께, 난 농구를 보면서 러닝머신을 하고 있었다.

“엄마야!”

갑자기 비명소리가 나서 보니까 냉장고 앞에 엄마가 주저앉아 있고, 바닥에는 미역이 흩어져 있다. 사건의 진상은 이랬다. 석달 전에 손목이 부러진 우리 엄마, 갖은 고생 끝에 뼈는 붙었지만 어깨가 굳고 손도 잘 못움직이신다. 그래서 물리치료를 받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완전하지 않다. 다른 사람한테서 “의수인 줄 알았다”는 충격적인 말까지 들은 엄마, “내가 다시 예전처럼 컴퓨터도 칠 수 있을까?”를 걱정한다. 그런 어머님이 냉장고에서 내게 줄 미역국을 꺼내다, 손의 힘이 약한 나머지 그대로 쏟아 버린 것. 커다란 상자에 든, 한 일주일 쯤은 먹을 양이어서 아깝기도 했지만, 그걸 엄마 혼자 꺼내려고 했던 게 속이 상했다.

“엄마, 그런 거 꺼내면 날 시키지, 왜 혼자 하고 그러세요?”

이렇게 언성을 높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후회된다. 엄마는 내가 운동하는 데 방해가 안되려고 그랬던 건데. 그런 말보단, “엄마 어디 다친 데 없으세요?” “미역은 제가 또 잡으면 되죠 뭐” 같은 따뜻한 말이 필요했을 것이다.


5. 난감한 일

냉이 뿌리를 다듬던 할머니가 그 뿌리를 몽땅 버리셨다. 난 잘 모르는데 냉이는 뿌리에 좋은 게 많다나? 엄마가 그 일로 할머니를 타박했더니 할머니가 그만 삐져 버린 것.

“어머니, 그걸 왜 버렸어요?” “세상에, 딸한테 박대받고 서러워 죽겠다” 이런 식으로 말다툼을 하시더니, 할머니는 집에 가시겠다고 옷을 입으신다. 밥을 먹던 나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할머니에게 가서 가지 말라고 붙잡았다.

“할머니 이렇게 가시면 나 오늘 저녁에 술 왕창 먹어버릴 꺼야!”

내 협박이 통했는지, 십분쯤 후에 할머니는 다시금 옷을 갈아입었다. 문제는 그날 내가 결국 밖에 나가서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셨다는 것. 하여간 못말리는 나다.


6. 결론

생각해 보면 엄마가 아프신 동안 내가 어깨와 손을 주물러 드린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잘해야 열 번? 게다가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느라 엄마 얼굴조차 본 적이 드물다. 갑자기 후회가 되어 그저께 밤에 주무시는 엄마를 깨워 한 십분 정도 손목과 어깨를 주물렀다.

“우리 아들이 해주니까 시원하네”라고 말씀하시면서도, 내가 그런 일을 하는 게 영 아까우신지 십분도 안되어 “이제 그만 하고 자라”신다. 자리에 누워 생각했다. 내가 우리집서 효자 소리를 듣는 현실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술약속에 가기 다섯시간 전, 엄마 어깨 주물러 드릴 시간은 충분한데, 나만큼 바쁜 어머님은 지금 집에 안계시다. 엄마, 빨리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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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春) 2005-04-16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군요. 하하

kleinsusun 2005-04-16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가 벤지에게 질투를 느끼신게 아닐까요?
손주랑 더 얘기도 많이하고, 더 가까이 있고 싶은데 컴만 하고 벤지가 젤로 가까이 있으니까....?
효도하세용! 저도 열씨미 효도를!!!

플라시보 2005-04-16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로 할머니와 어머님에 관한 애피소드군요. 재밌어요^^

진주 2005-04-16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께서 벤지보고 "이런 망할 놈"하신 것을 저는 알 것도 같은데요....

울보 2005-04-16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나 사랑스러운 할머니시네요..아마 손주를 아주 많이 사랑하시나봐요..

야옹이형 2005-04-16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같은 아들, 손주가 있으면 심심하지 않을 것 같아요. 미역을 잡아오겠다는데. 입밖에 내셨다면 너무 뜨끈해서 어머니의 엔돌핀이 화악 돌으셨을것 같아요. 페이퍼를 프린트해서 어머니랑 할머니께 편지로 보내시는 건 어때요?

호랑녀 2005-04-17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효자셔요. 술을 쫌만 덜 마시면 진짜 효자시겠어요 ^^
너 술마시러 나가면 너 없을 때 내가 벤지 구박한다... 어머님이나 할머님께서 그런 협박을 해보신다면 어떠실까...

2005-04-17 1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panda78 2005-04-17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요.. 호랑녀님.. ^^ ;;;
이런 글 쓰시는 마태님은 정말 효자십니다. 마음이 따끈해져요..

2005-04-17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터라겐 2005-04-18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효자는 같이 사는 여자가 피곤하데요...
아직 옆에서 피곤해 하는 여자가 없을적에 할머니 어머님께 열심히 효도를...

북극곰 2005-04-20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번에 너무 공감이 가는 군요. 저도 팔 아프다면서 서울 올 일만 있으시면 한보따리 잔뜩 꾸려오시는 엄마한테 매번 퍼붓곤 하지요. "아프다면서 이렇게 무거운 걸 갖다 주면 누가 고맙대? 하나두 안 고마워~!!"라며 남에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그런 가슴에 못박는 매몰찬 말들을 하곤 하죠. 항상 후회하곤 하지만 순간 버럭! 화가 나는 걸 참지를 못하는 군요. 자식들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