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400년을 보러갔다. 벼르고 벼르던 전시회를 갔다오니 시원하긴 한데, 좀 피곤하다. 원래 생각은 이랬다. 김윤식 교수가 했던 방식-그러니까 그림 하나를 눈감고 머리 속에서 그려볼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보는 것-대로 다 보자. 대략 다섯시간 정도는 전시장에 있을 생각을 하자. 그럴 마음으로 난 혼자 전시장에 갔고, 비상식량으로 쵸코렛도 챙겼다. 하지만 이론과 실제는 너무도 달랐다.


우선, 사람이 지나치게 많았다. 사람들이 뒤에서 밀고 앞에서 당기니 한 그림을 오래 본다는 게 불가능했다. 둘째, 너무 더웠다. 영하 10도라 내복에 두꺼운 담비털을 입었더니 땀이 비오듯 나서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셋째, 내게 있어서 그림 관람의 의미는 사진으로 봐오던 것을 실제로 본다는 데 있다. 하지만 그림들이 그다지 유명한 게 아니었고, 내 딴에 그림 공부를 몇 년 하고 갔지만, 화가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아, 이게 그거구나!’ 하고 탄성을 질렀던 것은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죽음>밖에 없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그림도 몇점 안됐고, 그리다 만 것 같은 그림도 꽤 많았다.


미스 하이드님의 충고대로 미리 도록-그림 설명집-을 사가지고 들어갔다. 2만원으로 성능에 비해 비쌌고, 그게 있으면 그림 대신 도록을 더 열심히 보게 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사진과 그림을 비교해서 보니까 좋았던 것 같다. 특히 다음 대목에서 유용했다. <스키로스의 아킬레우스>란 그림에서, 트로이 전쟁에 안나가려고 여장을 한 아켈레우스(브래드 피트 분)는 오디세우스가 가져온 장신구를 제쳐두고 칼에만 관심을 보인다. 그러니까 여자 얼굴을 하고 칼을 든 사람이 아킬레우스. 그런데 내 옆에 있던 애들은 이런 대화를 주고 받는다.

학생1: 누가 아킬레우스냐?

학생2: 맨 오른쪽에 남자겠지(그는 오디세우스다).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도록 가지고 잘난체하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다른 장면. <술리지방의 여인들>은 터키군에게 쫓겨 벼랑에 몰린 여인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애를 데리고 온 엄마가 설명을 한다.

“저기 봐라. 여자들이 앉아있지? 뭐하고 있을까? 그렇지. 놀고 있네”

하마터면 후후, 하고 웃을 뻔했다.


많은 인파가 몰리는 걸 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예술에 굶주려 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 전시회를 갔다고 뭐 그리 크게 내공이 향상된 것은 아닐 것이다. 모처럼 우리나라에서 열린 전시회에 갔다는 뿌듯함, 그리고 내 전략과목인 미술에 대해 더 열심히 공부하고픈 욕망을 갖게 된 게 오늘 전시회의 소득일 것 같다. 내가 지금 미술에 대해 공부를 한다고 좋은 그림과 나쁜 그림을 구별할 수 있는 눈을 갖게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내 목표는 그냥 소박하다. 유명한 화가들 작품을 보고 그게 누가 그린 것인지 아는 것, 그리고 나중에 루브르에 가서 공부한 것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는 것. 이런이런, 별로 소박하지 않다는 야유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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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5-02-26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스컴에서 띄우는 거면 어디든 가고 보잖아요. 물론 마태님처럼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많겠지만...더구나 방학 끝머리였다는 게 복병 아니었을까요? 전 그래서 갈 생각을 못하고 있어요. 사람 많은 곳은 좀 그렇거든요. 소박하고 찬찬히 볼 수 있는 전시회라면 좋겠는데 말이죠.^^

▶◀소굼 2005-02-26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번 샤갈전도 그랬지만 사람이 많이들 와서 예술에 관심이 많아진것 같아 좋긴 합니다만 그만큼 뭔가 보기 전에 알아두고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유치원 소풍처럼 그냥 주루륵 이런 게 있네~라고 지나가지 말고 말이죠. 전 좀 더 있다가 구경해야 겠어요. 애들 방학 끝나고^^;

비발~* 2005-02-26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설전시가 아닌 한 고즈녁히 감상하기는 거의 어렵더라고요...;;

조선인 2005-02-26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방학 끝나고 갈 작정이었는데, 수암님께서 못 기다리고 선수를 치셨군요.

노부후사 2005-02-26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비오던날 아침10시에 가서 보고 왔지요. 사람 없어서 좋던걸요. ㅋㅋ

하이드 2005-02-26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휴가내고 평일에 갈꺼에요. 그리고, '도록'은 원래 비싼거에요.

ceylontea 2005-02-26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저도 가고 싶어요.. 기간이 넉넉하다고 미루다가 달리전처럼 못보는 사태가 생기는 것은 아닐지 두렵습니다..

paviana 2005-02-28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설 연휴에 갔다 왔어요...사람이 생각보다 많았지만 설명해주는 분이 등장하자 모두 거기로 몰려서 한산했답니다..앵그르의 샘을 잔뜩 기대하구 갔는데 생각보다도 넘 작아서 좀 실망했어요..르느와르도 되게 작았지요..마태우스님같이 미술에 조예가 깊으신 듯한 분이 들으면 웃을거같아서 엄마랑도 거의 대화를 안하면서 보았답니다.ㅋㅋ

마태우스 2005-02-28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비아나님/그죠 앵그르 샘, 정말 작더만요. 랭스 미술관에 있는 것만 와서 볼 게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루브르 게 정말 보고 싶은데....한번 오려면 겁나 비싸겠죠??
겨울빛님/앗 루브르....우와와, 부럽습니다. 약탈한 게 얄밉긴 하지만, 우와와 루브르 다녀오셨다구요.... 전 언제쯤 갈 수 있으려나....
새벽별님/평일 10시라, 다들 준비를 단단히 하셨었군요. 음, 전 아침에 테니스를 치르나 좀 늦게 갔던 게 패착인 것 같습니다.
실론티님/어차피 평일은 못가니, 이제 남은 날이 많지 않더이다. 가시려면 어여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이드님/님 덕분에 도록 사서 도움이 되었어요. 근데 님, 아직 안가셨었군요^^ 제가 먼저 갔네요 호호
에피님/비오는 것까지 계산하고 가셨군요. 오오오 놀라워라.... 모든 그림을 머리에 담고 오셨겠네요.
조선인님/3월에는 마지막이라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음, 이건 제가 인파로 고생했으니 댁들도 고생해라, 이런 심보는 저얼대 아닙니다.
비발님/맞아요. 예술에 대한 굶주림들이 어찌나 심한지.... 고즈넉이 감상하는 건 정말 어려울 것 같아요
소굼님/알라딘 분들은 미술에도 참 조예가 깊으신 것 같습니다. 제 친구 중 하나는 제가 거기 간다니까 "왜가냐?"고 의아해하더군요. ^^
스텔라님/제가 눈이 나빠서 앞에 가서 봐야 해서 사람이 문제됐거든요. 눈만 좋으면 사람이 많아도 좀 떨어져서 본다는 생각을 하면 문제가 없을 거예요. 눈 좋으세요?

플라시보 2005-02-28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도시에도 그 전시회가 내려올까요? 예전에 달리는 왔었는데...오면 가봐야겠습니다.^^

마태우스 2005-03-01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시보님/아마 안갈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샤크 2005-03-01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술도 관심이 있으신가봐요. 미학쪽은 영 아니실꺼라 생각했는데.. 암튼 잘참으셨어요. (근데 자꾸 참음 병나요^^*)

샤크 2005-03-01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전시회가 지방순회 안하는데 왜 님이 죄송하죠? 혹시 님이 주관하시나요?

마태우스 2005-03-01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크님/미술은 제가 공부하고픈 분야랍니다. 음악은 포기했고 미술만이라도 어떻게 좀 알아볼까 싶어서요. 글구 저란 놈은 희한하게도 모든 일을 제가 주관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