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더 이상 필요없다. 그곳은 이제 피만이 난무하는 정글이 되어 버렸다”
30년간 고스톱을 쳐온 파란여우의 말이다. 청단 패를 하나도 안들고도 곧잘 청단을 해내 ‘미스 청단’으로 불렸던 그녀는 최근의 고스톱판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했다.
고스톱판이 변했다. 기술은 돈 따는 데 하등 소용이 없다. 오직 피를 먹기 위한 살벌한 경쟁만이 벌어지고 있다. ‘전통 고스톱 살리기 운동본부’를 이끌고 있는 조선인의 말이다.
“옛날에는 띠가 바닥에 있으면 당연히 띠를 먹었죠. 하지만 지금은 다들 피만 먹으려 듭니다”
세 번 싸서 3점을 내는 신기의 기술을 선보이곤 했던 마냐는 이 사태의 원인을 이렇게 분석한다.
“이게 다 조커 때문이어요. 조커 하나가 피 두장으로 계산되니 그거 3장만 먹으면 피 6장이 그냥 생기는 거잖아요. 게다가 편법을 동원해서 피를 늘리기도 합니다. 국진 5끝짜리는 원래 5끝과 피 둘다 쓸 수 있는 거였지 쌍피는 아니었거든요. 지금은 당연한 것처럼 쌍피로 쓰이고 있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비 무늬의 제비 대신 쌍피를 넣어 비 쌍피가 두 개가 되버렸어요. 인터넷 고스톱에서는 초단 5끝짜리마저 쌍피로 쓰이고 있는데, 실제로도 그렇게 치는 곳이 많아요”
계룡산에서 초단을 하는 기술만 5년을 익히고 온 매너리스트는 이렇게 탄식한다.
“도 닦고 왔더니 피가 고스톱을 정복했더군요. ‘폭탄’이라고, 예전같으면 흔드는 게 고작이었던 패가 피 2장을 덤으로 받게 되었잖아요. 이런 판국에 누가 초단에 신경을 씁니까? 으흐흑”
훨씬 더 불어난 피 때문에 사람들은 피를 모으는 데만 혈안이 된다. 설 연휴 때 고스톱으로 15만원을 딴 수니나라의 말이다.
“3광이나 청단으로 나봤자 3점밖에 안되요. 심지어 고스톱에서 가장 큰 기술인 고도리도 5점밖에 안되죠. 하지만 피를 모으면 10점은 우습더라구요”
새해 고스톱계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미스 하이드는 광을 무시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피가 가장 중요하지만, 광도 중요합니다. 광박에 흔들면 4배를 받을 수 있잖아요. 전 그래서 비광도 차별하지 않고 먹으려고 합니다”
나이든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고스톱을 즐기는 젊은이들은 고스톱판이 훨씬 재미있어졌다고 말한다. 얼마 전 믿기지 않는 대역전극을 펼친 멍든사과는 그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따우님이 투고를 불렀을 때만 해도 제겐 피가 3장밖에 없었어요. 스리고에 피박 쓰겠다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두장짜리 피에 해당하는 조커가 연거푸 두장이 나온 거예요. 게다가 국진 쌍피를 피로 먹었고, 똥 쌍피를 피로 먹었죠. 그랬더니 피가 총 13장이 되더군요. 그때 따우님 표정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그런 표정이었어요. 안그랬다면 따우님이 한 20점 가까이 났었을 거예요”
이걸 보면 ‘Go'를 부를 때 신중해야 하겠지만, Go를 부르는 건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주부 도박단을 이끌고 있는 진우맘의 말이다.
“예전에는 Go를 하려면 최소한 3번은 해야 하잖아요? 지금은 두 번만 쳐도 고를 할 수 있으니 고가 더 늘어날 수밖에요”
피만 추구하는 고스톱이 된 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바른 고스톱 운동본부’의 박찬미 대표는 이 문제를 이렇게 정리했다. “전 이게 사회를 반영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사회의 황금만능 풍조가 고스톱 판에서 피만 중시하는 트렌드를 만들어 낸 거죠. 고스톱 치는 사람만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박대표의 말을 들으니 점점 퇴보해 가는 이공계 생각이 났다. 이공계가 다시 대우받는 그날이 오면 고스톱판에서도 기술 고스톱이 다시 득세할 수 있을까.
-정리: 마태우스 기자-
* 종종 아래와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하죠. 고스톱 칠 때는 언제나 즐겁게 칩시다.
-고스톱 점수 놓고 흉기 난동 -
충남 조치원경찰서는 22일 고스톱을 하던 중 흉기를 휘두른 혐의(살인미수)로 김 모(55)씨를 긴급체포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20일 오후 11시 30분께 연기군 금남면 자신의 집에서 함께 고스톱을 치던 한 모(47)씨의 왼쪽 옆구리를 주방에 있던 칼로 1차례 찌르고 폭행한 혐의다. 경찰조사 결과 김씨와 한씨는 한씨의 점수가 몇점이냐를 두고 말다툼을 시작, 흉기난동으로까지 번진 것으로 확인됐다.
[연합뉴스] 2004-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