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화는 1-2주만에 간판을 내리는지라 숨이 가쁘다. 봐야지, 라고 생각하며 날짜를 잡고 있으면 영화가 종영되곤 한다. <팜므 파탈>이 그 대표적인 예. 지난 토요일, 여친과 영화를 한편 보기로 했다. 여친은 <브리짓 존스2>, 나는 <까불지마>를 봤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막상 본 건 <나비효과>. 재미없을까봐 불안했지만, 이게 웬걸. 제법 재미있다. 미녀와 같이봐도 재미있다면, 상당히 재미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라이프니쯔라는 사람은 선택의 귀로에 선 우리가 가지 않았던 그 길에 대한 세계가 무한히 많이 존재한다고 했다. 나는 오늘 아침 기차를 타고 온 세계에 살고 있지만, 내가 버스를 타고 온 세계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거다. 물론 그 세계는 소통 불가능해, 그런 게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나비효과>과는 그 세계들의 왕래가 가능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하지만 어떤 길로 가든지 주인공은 불행하기만 한데, 다행히도 마지막에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것도 해피엔딩에 속하는지 모르겠지만, 장애인이 되거나, 감옥에 갇혀 다른 죄수의 그것을 빠는 것보다야 백번 나을거다. 나름대로 만족하여 극장을 나서는데, 뒤에 오던 여자가 남자에게 뭔가를 설명한다.


“감독이 원한 결말은 이게 아니었어. 아이가 나오자마자 스스로 목을 졸라 죽는다는 게 감독의 결론이었는데, 그게 너무 찝찝하니까 영화사 측에서 바꾸라고 했데”


그 말을 듣고보니 그 결말이 더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 그것 말고도 그녀는 또다른 말을 했고, 나와 미녀는 그녀에게 귀를 기울였지만, 사람들의 소음 때문에 듣지 못했다. 중요한 말 같았는데.




과거가 바뀌면 미래가 바뀐다, 이건 당연한 명제 같지만 꼭 그런 건 아니었다. 기존의 타임머신 영화들은 과거에서 신나게 놀다가 현재로 복귀해선 그간 지속되었던 삶을 그대로 살아가곤 했다. 그 판에 박은 공식을 바꾼 건, 적어도 내가 알기에는, 스티븐 스필버그다. 희대의 역작인 <백 투더 퓨쳐>에서 스필버그는 과거가 바뀌면 미래가 바뀐다는 평범한 진리를 웅장하게 재현했고, 그 이후에 나온 영화들은 그의 공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물론 예외도 있다. <타임머신>이란 영화에서 주인공은 강도에게 살해당하는 여자를 구하러 과거에 간다. 하지만 가까스로 구한 그녀가 마차에 치여 죽자 인간이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엄청난 미래로 가버린다. 그가 보여주는 미래 역시 음울하기 짝이 없는데, 나야 뭐 그때까지 살 게 아니니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다. 2편까지 나온 <데스티네이션> 역시 정해진 죽음을 피한다 해도 죽음은 다른 방법으로 그에게 찾아간다고 역설한다. 반면 <삼국지>의 관노는 내일 모래 죽을 사람의 운명을 신통한 기지로 바꿔 백년을 더 살게 만드는데, 운명에 대해 이런저런 설들이 나도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아닐런지. 지금도 아르헨티나 어딘가에는 나비가 날고 있을거다. 내 운명을 결정지을 나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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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frog 2004-11-30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비효과 곳곳에서 좋은 평들이 들리네요. 저도 꼭 봐야겠습니다..!!

마태님, 요즘 너무 행복해 보여요..!!^^

노부후사 2004-11-30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섹스토이 군 연기가 상당히 나아졌다고 하던데, 저도 안 볼려다가 귀가 설어지네요.

진/우맘 2004-11-30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마지막 문장 멋지네요.

지금도 아르헨티나 어딘가에는 나비가 날고 있을거다. 내 운명을 결정지을 나비가.

!

날개 2004-11-30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밌게 본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 해피엔딩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갑자기 모든 사람이 다 잘되는 걸로 끝나니 웬지 허탈하더군요..ㅡ.ㅜ

sweetmagic 2004-11-30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싶어요 !!

비연 2004-11-30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봐야겠군요..진/우맘님도 추천하고 마태님도 추천하니...

sooninara 2004-11-30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줄거리를 너무 많이 알려준거 아닙니까? 전 일부러 허벅지 찔러가며 참았는데..^^

2004-11-30 2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라시보 2004-12-01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이 영화 다들 재밌게 봤다고 하더라구요. 저도 오늘 볼까 말까 망설이고 있습니다. (영화에 대한 망설임보다는 어제도 회사서 일하다 빠져나가 영화를 봤는데 이틀 연짱으로 그짓을 해도 되는건지에 관한 망설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