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책 제목은 <능금등급의 심층연구>랍니다.
고교등급제를 보는 내 마음은 복잡다단하다. 고교의 서열을 인정하는 것은 사실상 평준화를 해제하자는 것이고, 그건 평소 평준화를 소리높여 주장해 온 내 소신과 어긋난다. 하지만 강남 애들이 강북보다 학력이 뛰어난 것도 사실이고, 국가가 제도적으로 강제하는 게 아니라 몇몇 대학에서 알아서 등급제를 실시한다는데, 학생 선발에 있어서 그 정도 재량도 인정하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싶기도 하다.
좀 다른 얘기를 해보자. 옛날만 해도 의대 졸업생은 자기가 나온 대학의 부속병원에 인턴 지원을 했다. 동료.선배가 많은 병원에 가는 게 수련의 생활을 하는 데 아무래도 편하지 않겠는가. 외부 병원은 성적이 좀 처지는 경우에나 가는 거였다.
91년으로 기억한다. 우리 학교를 나오고 군대를 다녀온 선배 하나가 S대병원 인턴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말았다. 인턴 시험은 거의 1: 1이라 떨어지는 경우가 별로 없었는데, 그 선배 대신 타대학 출신이 합격을 한 거였다. 그때 병원 벽에 대자보가 붙었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내용은 이거였다.
“그 선배는 우리 학교를 중간 정도 되는 성적으로 졸업했다. 우리 학교 100등이 타대학 출신보다 못하단 말인가!”
그 선배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긴 해도, 난 그 대자보에 공감하지 못했다. 대자보가 지나치게 서울대 패권주의에 빠져 있는 듯 보였기 때문.
언제부터인가 ‘서울대’의 정의가 ‘서울에 있는 대학’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지방 소재 대학의 우수 학생들이 우르르 서울에 있는 병원에 지원을 했다. 인턴 시험에는 학교 성적의 비중이 높으니 그들은 당연히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을 했고, 이건 S대 병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 소재 병원들은 지방대 출신이 많아지는 게 맘에 안들었나보다. 그래서 나온 게 대학 등급제. 지방에 있는 대학을 나오면 성적의 일정 부분만 인정해 주기로 한 것. 내가 지금 있는 학교라면 70%만 인정을 해준단다. 1등으로 졸업해 성적 점수가 300점 만점을 받았다 해도 210점만 인정하겠다는 것. 그 결과 지방 출신들은 어찌어찌 인턴은 한다해도, 자신이 원하는 과를 전공하기가 힘들어졌다. 탁월한 성적으로 졸업한 우리 졸업생 한명은 인기과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만다.
이걸 바라보는 내 마음은 당연히 착잡하다. 대학간의 서열이 관습적으로 통용된다 해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차별을 하다니! 강북 소재 고등학교의 선생님들, 그 학교에 아이들을 보낸 학부모들의 마음이 그제서야 이해가 갔다. 해법은 있다. 우리 애들이 죽어라고 열심히 공부함으로써 의사고시에서 두드러진 성적을 계속 낸다면 현재의 70%가 80, 90%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이건 이론상으로만 가능할 뿐, 입학 커트라인도 우리보다 더 높고, 교수 숫자도 많을뿐더러 공부도 훨씬 많이 시키는 대학들을 따라잡는 건 그리 쉬운 건 아닐게다. 약자는 그래서 서러운 법, 약자가 되고나서야 고교등급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다니, 내가 너무 간사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