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경 수술이 끝난 뒤 의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두 달 동안은 절대 술을 마시면 안됩니다.”

그게 10월 중순의 얘기, 지금이 3월 말이니 벌써 다섯 달이 지났다.

119를 타고 응급실에 실려가야 할 일이 터진 건 10월 말이니

그때부터 친다 해도 최소한 넉 달이 지났다.

그래서 난 “의사가 마셔도 된다고 했다”며 은근슬쩍 다시 술을 시작하려 하지만,

아내는 요지부동이다.

언젠가 술을 같이 마셔주길 원하는 선배의 청을 뿌리치지 못해

사케 3잔을 마시고 왔을 때,

아내는 그 다음날 내 어머니를 찾아가 속상하다면서 울었다.

졸지에 난 ‘정신 못차리고 매일같이 술만 퍼마시는 놈’이 됐고,

하루 종일 비난전화 & 문자를 받아야 했다.

 

그 뒤 난 소주잔에 사이다를 넣어 마시며 길고 긴 술자리를 버티는 놈이 됐는데,

솔직히 30대의 대부분을 술로 달렸던 전력이 있는지라

지금 술을 못마시는 게 그다지 아쉽진 않다.

학생들한테 “마실 수 있을 때 많이 마셔두라”고 말하는 것도 그런 취지.

술을 안마시게 되면서 내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내가 같이 마시던 사람들을 차-그 빨간 마티즈-로 실어 나르게 됐다는 거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건 상상이 안되는 일이었다.

술을 많이 마시면 정신을 잃는 주사 때문에 주변의 많은 친구들이

비대한 몸을 가진 날 데려다주느라 갖은 고생을 했다.

길바닥에 누운 날 일으켜 세우려던 한 친구는

에라 모르겠다 싶어 내 옆에 누워 같이 잠을 잤으며,

기차역 광장에서 나랑 나란히 누운 선배도 있었다.

그런 만행에도 불구하고 난 꿋꿋하게 술을 들이켰고,

계속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쳤다.

그러던 내가 이제 다른 누군가를 데려다주고 있으니, 세상이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을까?

 

어제, 울 학교에 근무하는 고교 동문들의 모임이 있었다.

삼겹살과 김치찌개라는 풍성한 안주 덕분인지 소주병이 빠른 속도로 비워지고 있었지만,

난 소주 쪽으로는 눈도 안돌린 채 삼겹살만 열심히 먹었다.

물론 속으로 이런 말은 했다.

“에유, 저 소주, 나한테는 한입 거리도 안되는데....”

술을 마구 마시면서 술자리를 선도하던 그 시절이 가끔은 그립긴 하지만,

내가 술을 안마신 덕분에 선배들이 편하게 집에 갈 수 있었으니,

이런 삶도 보람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언젠가 남은 술을 싸가지고 내 차를 탄 동료가 그만 차 뒷좌석에 술 반병을 쏟고 말았다.

그 술이 공부가주라고, 공자가 마시던 중국술이었는데

향기가 어찌나 센지 냄새만으로도 취할 지경이었다.

아내한테는 “아유, 냄새가 너무 심해서 어지럽더라”고 했지만,

사실 난 그 냄새를 즐기고 있었다.

마시지도 못하는 처지인데 냄새라도 맡는 게 어디인가?

차에서 내릴 때 창문을 안열어 놓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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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 2012-03-23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을 안 좋아하는 저로써는 이해안되는 부분이지만,,
건강 잘 챙기세요,,

마태우스 2012-03-24 18:38   좋아요 0 | URL
저도 술 안좋아했으면 좋았을 뻔... 글쓰고 나니 좀 더 생각이 납니다

재는재로 2012-03-23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도 어쩌다 한번 마시고 싶은때는 마시는게 좋은데 너무 참는것도 병이 되죠
모든게 너무 과해서 병이 되니까요 적당한 음주도 좋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비오는 날에는 막걸리에 파전이 최곤데~ 건강조심하세요

마태우스 2012-03-24 18:39   좋아요 0 | URL
제말이 그말입니다. 재는재로님의 이런 생각을 제 아내가 알아야 할텐데 그렇지가 않네요. 막걸리만 마실 수 있다면 안주야 없어도 무방합니다^^

BRINY 2012-03-23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해서 냄새로만 참아주셔야겠습니다.

마태우스 2012-03-24 18:39   좋아요 0 | URL
아 네... 그, 그렇죠...?

paviana 2012-03-23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술 안마신다고 비난 전화&문자 하는 사람은 없나 보네요.

마태우스 2012-03-24 18:39   좋아요 1 | URL
직접 비난은 안하지만, 제가 술 안마시니 술자리가 휭...하다는 말은 들었습니다ㅠㅠ

순오기 2012-03-23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섯 달이 되도록 금주명령을 잘 지키고 있다니 '상'받으셔도 되겠네요.
의사의 권유보다 부인의 눈물이 더 쎄군요.^^

마태우스 2012-03-24 18:40   좋아요 1 | URL
상으로 술 한잔, 이랬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서 슬퍼요ㅠㅠ
의사는 분명 두달 후부터는 괜찮다고 했는데 흑흑

페크pek0501 2012-03-23 1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술을 대학교4학때 배웠어요. (저는 뭐든 늦었어요.ㅋ)
수업 끝나면 친구들과 주점이나 호프집에 몰려 다니곤 했는데 그게 연애보다 더 신났어요.
신세계를 만나는 기분이었죠. 아, 술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이러면서요.
안주로 나오는 음식은 왜 그리 맛있는지... 파전, 도토리묵, 떡볶이 참 맛있게 먹었는데,
술이 더 좋았는지 안주가 더 좋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니까요.
주량도 안 마시면 줄어드나봐요. 몇 년전 회식자리에서 술을 마셨는데, 소주 세 잔에
취하더라고요. 예전엔 이것보다 잘 마신 것 같은데... (현재, 1년에 한 번 마실까 말까 한다는 것.)
그러니까 제가 소주 반 병도 못 마시고 취할 수 있는 좋은 체질인거죠.
저만큼 취하려면 몇 병을 마셔야 하는 이들을 보면 안 됐어요. 기분은 똑같이 좋은데,
몸이 상하잖아요.
스텔라님 서재에서도 얘기했는데, 여기서도 한다는... 오늘처럼 빗소리 들으며 마시는 술은 환상적이라고...ㅋ
그런데 술냄새는 싫던데요... 아무래도 저는 꾼의 경지에는 못 간 듯해요. ㅋㅋ

마태우스 2012-03-24 18:45   좋아요 1 | URL
어맛 페크언니 안녕하셨어요
1) 술 말고 또 늦으신 게 있나봐요? 남자들은 보통 억지로 술을 먹게 되니, 늦을 염려가 없더라고요
2) 흠, 신세계라... 전 술을 마시는 게 그닥 좋은줄 몰랐어요. 역시 억지로 해서 그런가... 오히려 술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건, 인생의 희노애락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이후였죠.
3) 안주를 좋아하셨군요. 하기야 저도 안주는 무지 좋아하는 편...울나라 안주는 죄다 살찌는 것들 뿐이라서, 제 배가 그렇게 솟았던 거랍니다.
4) 뭐든지 안하면 줄게 마련인 듯해요. 저는 주량이 소주 두병 반이었는데, 그거 가지고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조금만 더 잘 마시면, 하고 바란 적이 많습니다. 지금처럼 간다면 흑, 저도 반병으로 줄어들까 걱정이 되네요.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도 열심히 해야겠어요.
5) 술냄새가 싫으시다구요. 공부가주는 좀 다르답니다. 향수로 써도 될 정도라니깐요^^

saint236 2012-03-24 0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그렇군요. 저도 그런 기억이...예전에 친구들이 술자리만 생기면 저를 꼭 찾았습니다. 가서 사이다 마시고 열심히 안주만 먹는데도 저를 굳이 데리고 간 이유는...제가 마지막까지 앉아 있기 때문이죠. 택시 태워서, 혹은 버스 태워서 보내고. 한 친구는 자기 어머니에게(그분은 아직까지도 저를 신뢰하십니다) 얼마 안마셨다고 둘러대기 위해 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하룻밤 재우기도 했습니다. 벌써 15년이 지난 이야기네요. 때론 탄산에 취해 안주발 세우는 것도 꽤 재미 있습니다.

마태우스 2012-03-24 18:45   좋아요 1 | URL
우와 세인트님이 그런 분이셨군요. 끼야...이제부터 제가 세인트님의 명성을 이어받아 열심히 해봐야겠군요. 그런 친구가 술자리에 있으면 정말 든든할 것 같긴 하네요.

하늘바람 2012-03-25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술 정말 드시지 마세요. 정말요

마태우스 2012-03-31 13:59   좋아요 1 | URL
네...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착하게 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