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맞춤'은 관계있잖아요?

2년 전부터 우리집에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제사 전날부터 어머니와 제수씨는 부엌에 들어앉아 하루종일 음식을 만드신다. 남자로 태어난 덕에 정말이지 난 팔자가 편하다. 부엌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전 같은 걸 집어먹다가 “어머나 제수씨, 맨날 이렇게 고생해서 어째요. 내년에는 꼭 하나 데려올께요”라는, 나 자신도 믿지 못할 약속을 하곤 했다.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차례 음식을 나르거나, 사용한 접시들을 설거지 기계에 넣곤 하지만, 일년에 세 번씩-설.추석.제사-우리집에 와야 하는 제수씨의 고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나만큼 편한 분들이 또 있다. 바로 우리 고모님들. 원래 다섯이었지만 한분은 돌아가시고, 또한 분은 상태가 안좋으셔서 세분만 오시는데, 그분들은 제사에 즈음하여 우리집에 오셔서 마루에 앉아 수다를 떠신다. 그러다 차례상이 차려지는 걸 보면서 한마디씩 거든다.

“이건 왜 안했어?” “그건 그렇게 하면 안돼! 서씨가 양반 집안인데 이게 뭐야?”

손도 까닥 안하면서 간섭만 하시는 고모님들 덕분에 어머님은 제사 때면 몇 번이고 시장에 다녀오셔야 했다. 고모들과 작은아버지, 나, 그리고 우리 형제들이 정성껏 만든 음식을 먹으며 수다를 떠는 동안, 큰어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제수씨는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간단한 식사를 하셨다.


차례는 각자 모시니 명절 땐 고모님들이 오시지 않았지만, 작은아버님만은 꼭 우리 집에 오셔서 차례를 지내셨다. 작은아버지 또한 원리원칙에 충실한 분이라 “홍동백서”로 시작하는 차례상 차리기 법을 우리에게 강조하셨다. 이것 해라, 저것 해라를 읊조리는 작은아버지의 말들이 솔직히 귀찮았고, 왜 이런 걸 해야 하는지 짜증도 났다.


대전에 있던 큰집이 서울로 오면서, 올 추석부터 작은아버지는 큰집에 가셔서 차례를 지내신다. 간섭할 사람이 없는 순수한 우리 가족만의 차례, 어머니는 이렇게 선언하셨다.

“이제부터 실용적으로 상을 차리겠다!”

사실 차례상에 오르는 음식들 중 겉모양 때문에 올리는 게 얼마나 많은가. 너무 커서 징그럽기만 한 생선들을 비롯해서, 전은 왜 그리 종류가 많으며, 그것 말고도 먹지도 않을 음식이 상에 놓였다 버려지는 게 그간의 관례였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어머님의 선언은 내게도 신선하게 들렸다. 내가 차례를 주관해야 한다는 게 무섭긴 하지만, 그것도 하다보면 자연히 늘겠지 뭐. 실용적인 차례상이 차려질 내일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어제 마트에 들렀다가 만두 시식을 했다. 너무도 맛있는 만두에 놀라 두봉지를 샀다. 아침에 만두를 먹으려고 물을 끓이자 어머님이 이러셨다.

“인스턴트가 뭐가 좋다고 그래. 엄마가 만두 해줄께!”

하지만 막상 만두 맛을 본 어머님은 내가 세 개를 먹는 동안 나머지-한 열 개 쯤 된 것 같다-를 모두 드시는 저력을 발휘하셨고, 다 드시고 난 후에도 “맛있다”를 연발했다. 제사 음식-맞춤상-이 판매된다는 걸 신문에서 보고 “엄마, 우리도 그거 사서 하자!”고 졸랐던 적이 있다. 하지만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셨다. “정성이 없어 보이잖아!” 인스턴트 만두가 더 맛있는 것처럼, 전문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맞춤상의 맛도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게 더 비싸다고 해도-사실은 그렇지도 않지만-거기에는 어머니와 제수씨의 인건비가 빠져 있지 않은가. 남자들이 아무리 돕는다 해도 제사는 결국 여성의 몫, 세상은 편하고 좋은 것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왜 여성들의 삶은 계속 척박해야 할까? 어머님이 맞춤상을 거절하고 중노동을 택하신 건 아마도 다른 친척의 눈을 의식한 것도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만의 차례를 지내니 계속 설득한다면 결국에는 돈주고 사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까.


난 우리 세대에는 집에서 지내는 제사가 없었으면 좋겠다. 특정 계층을 부엌에 가둔 채 수다를 떠는 제사보다는 모두 음식점에 모여 즐겁게 얘기를 나누는 게 훨씬 더 인간적이지 않을까? 그게 곤란하다면, 맞춤상을 선택하는 지혜라도 발휘하자. 두시간을 위해 하루 나절의 중노동을 하는 것은-적어도 우리 집에서는-올 추석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 글을 쓰고나서 엄마한테 "맞춤상으로 합시다!"라고 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무슨 맞춤상이야? 너도 빨리 데려와!!!!!" 흠, 그렇단 말이지. 내가 데려오나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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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9-27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려오시는 건 좋지만 고생은 시키지 마시길 ^^;

플라시보 2004-09-27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사상을 직접 차리지 않는 그러니까 부엌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최소한 님처럼만 생각을 해도 좋을텐데 안타깝습니다. 정작 일은 안하면서 그 일의 수고로움은 모르고 간섭만 디립다 해대니 진짜 어떨때는 미워 보입니다. 아무튼 저도 맞춤상에 찬성입니다. 남들은 제사는 정성이다 하지만 그렇게 정성이 중요하면 다 같이 정성을 보태어야지 왜 정해진 몇몇 여자들만 정성을 넘은 중노동을 해야하나요. 조금 덜 수고롭게 재사를 지낼 수 있다면 명절 증후군 같은것도 사라질텐데... 음. 아니면요. 전 제사 메뉴를 좀 합리화 시켰으면 좋겠어요. 어차피 가족들이 다 먹는건데 가족이 좋아하는 음식으로다 하면 안되나? 예전에 코메디 프로에선 우스개로 제사상에 피자 올리고 그랬는데 전 그거 보면서 '저거 진짜 말 된다' 싶었거든요. (바보같은 소리라면 죄송^^)

노부후사 2004-09-27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음식 만들 때 남자도 부엌에 들어가 여자들과 같이 지지고 볶고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음식도 그렇게 밥상 부러지게 차릴 것도 없이 가족들이 먹고 싶은 걸로 정해서 적당히 만드는 것이 더 나을 것 같구요. 암만 생각해도 요즘 차례상에 오르는 음식들, 너무 낭비가 커요. 손품은 많이 드는데 대부분이 기름진 것들이라 아무래도 금방 질리게 되죠. 곰곰 생각해보면 옛적 차례상이 오늘날의 차례상과 비슷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기름에 튀겨먹는 조리법이 고려 중기 즈음에 들어왔다곤 하나 기름에 튀기는 조리법 자체가 북방 이민족의 습성이었기 때문에 중화의 전통을 중시하셨던 사대부들께서 튀긴 음식을 드셨을지 의문이에요. 제 생각에 오늘날 상다리 휘어지게 차리는 차례상에는 식민지와 전쟁을 겪으며 경험했을 살인적인 기아와 배고픔이 강하게 배어있는 것 같습니다. “매일 먹지는 못하지만 오늘 하루는 배터지게 먹어보자” 이런 생각이었겠죠. 여하튼 플라시보님 의견에 적극 찬성이에요.

다연엉가 2004-09-27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니의 돌 덩어리가 들어 앉아 변하지 않듯이 저도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전 가감히 그 돌 덩어리를 깰 겁니다. 그러나 너무 앙팡지게 깨기 보다는 적당히 깰 생각입니다. 남자분들이 마태우스님의 생각을 가졌다면 마춤상을 안해도 여자는 행복할 것 같아요.

starrysky 2004-09-27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명절 때마다 빈둥거리는 남자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예요.
그런 의미에서 마태님도 감점 5점! 생각이나 말만으로는 안돼요. 행동이 있어야지요. ^^

LAYLA 2004-09-28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명절때도 마태님 글보고 감동먹었는데 명절마다 마태우스님의 착함을 다시 느낍니다.
-오늘 뉴스에서 '마테우스'를 봤어요.
이탈리아인가? 자기를 입양해 달라고 신문광고 냈던 할아버지 기사였는데 그 할아버지를 입양한 가족의 아들이름이 '마테우스' 더군요 ㅎㅎ 뉴스자막보고 얼마나 웃었던지 ㅎㅎ

ceylontea 2004-09-28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절 말고.. 일상에서도 남자들은 많이 바귀어야 합니다.

마태우스 2004-09-28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그게 고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이뤄지는 것 같습니다. 잘 모셔야 양반이다는 생각 때문에 오버를 하는 게 아닐까요? '작은별'은 누구신지요??
실론티님/맞아요.... 남자들도 피부를 잘 가꿔야..<--썰렁한가요?
라일라님/사실은 저 별로 안착해요. 흑흑. 그 마테우스는 정말 착한 분이네요
스타리님/예리한 스타리님... 그럼 전 95점인가요?^^
책울타리님/돌을 깨려면 최배달처럼 산에 올라가 열심히 연습해야 한다는...
에피메테우스님/님의 내공은 정말정말 대단하십니다. 차례상 뒤에 그렇게 깊은 의미가 있었군요!!!!!!!!!!!!!!!!!!!!! 님의 가르침에 늘 감사합니다.
플라시보님/님이야 언제나 옳은 말씀을 하시죠. 피자라...호홋. 말 됩니다.
체셔고양이님/그, 그래야죠....

panda78 2004-09-30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시집 식구들 중에 마태님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더군요. 한사람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부터인가 제사 때 올리는 떡은 사 와서 쓰고 있는데(물론 추석 때 송편은 만듭니다), 그거 보실 때 마다 아버님 하시는 말씀. 허 참. 떡도 집에서 해야 하는데.. 정성이 부족해..
아들들. 끄덕끄덕.
결국 다 먹지도 못하는 제사 음식 만드느라 땀 뻘뻘 흘리고 있다 보면,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나 싶어요. 하지만 우리 대에서도 바뀌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우리 시댁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