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9월 16일(목)
장소: 강남
마신 술: 소주--> 생맥주--> 양주
“술꾼들은 늘 마실 건수가 생겨서 할수없이 마신다고 불평하곤 한다. 하지만 그 건수의 대부분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도미니카의 철학자 아드리안 벨트레가 한 말이다. 과연 그럴까. 엊그제 일을 생각하면 난 이 말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선생님, 저 xx대 못가게 됐어요”
목요일, 금요일을 ‘술 안마시는 날’로 정해놓았던 난 심복의 전화를 받는 순간 “이번주는 내내 술을 마셔야겠구나”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다른 대학에 교수로 갈 날을 꿈꾸면서 모교에서 11년을 버텨온 내 심복, 그녀는 거의 확실할 것으로 알았던 xx대에서 사람을 뽑지 않기로 했다는 비보에 절망하고 말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고, 난 그녀에게 위로주를 마시자고 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그녀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지만, 난 삼겹살에 소주를, 그리고 생맥주를 사주는 것 말고는 달리 해줄 게 없었다.
“제가 열심히 해서 우리 학교에 자리 하나 만들께요”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날이 과연 언제 올지 의문스럽다.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은 사람을 지치게 하는 법, 모교에서 결코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아갈 심복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착하디 착한 심복이 혼자 영화를 보면서 울던 시각, 모교에서는 천모씨가 자신 앞으로 배정된 집기들을 배치하느라 사람들을 닦달하고 있었단다. 지난 7월 모교의 교수로 발령을 받은 천모씨, 그녀는 약자에 강하고 강자에 약한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윗 교수님들에게는 입안의 혀처럼 굴지만, 아랫 사람은 철저히 짓밟았다. 그녀 아래서는 양같이 온순한 사람도 투사로 돌변했고, 대부분 그녀와 한판 붙고나서 교실을 떠났다.
그녀는 동경대에서 박사를 땄다. 박사과정을 하면서 가끔씩 우리 교실에 들렀던 그녀는 “일본애들이 자기를 왕따시킨다”고 하소연했다. 난 그게 한국인을 차별하는 일본인의 습성에서 비롯된 줄 알았었지만, 그녀가 모교에 들어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든 왕따는 자신의 탓이 더 크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 교실에서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천모씨는 다시 왕따가 됐다. 그녀의 말이다. “일본에서 지낼 때보다 훨씬 힘들다”
의대 출신이 아니라는 콤플렉스 때문인지 그녀는 늘 동경대 박사를 강조했다. “여기 사람들은 동경대 박사를 존중할 줄 모른다. 일본에서는 내가 지나가면 놀이터의 아이들도 인사를 했다” 동경대 박사, 그게 대단하다고 하자. 하지만 그 대단함은 연구로, 그리고 논문으로 증명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우리 교실에 근무하는 동안 뭐 하나 제대로 보여준 게 없었다. 국내 대학 박사들은 날고 기는데 비해, 그녀는 언제나 논문점수가 모자라 헉헉대야 했다. 그녀는 거의 실험실에 나오지 않았고, 윗 선생님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만 최선을 다했다. 동경대 박사인 그녀가 아랫사람에게 했던 말들이다.
“고졸 주제에 감히..”
“못배워먹은 것이 어디서...”
“가정 교육이 틀려먹은 인간”
원래 사람들간에 사이가 좋기로 유명했던 우리 교실은 남의 말을 확대과장증폭날조하는 데 대가인 천씨가 들어온 이후 갈등의 메카로 거듭 태어났다. 착하기로 소문난 Y가 천씨에게 대들다 잘렸을 때, 난 지도교수를 찾아갔다.
“이건 전적으로 천씨가 나쁜 겁니다. Y를 자르는 건 말이 안돼요!”
그때 처음 알았다. 내 지도교수는 나보다 Y를 훨씬 더 좋아한다는 걸. 그 후에도 여러번 천씨의 잘못을 지도교수에게 간언했지만-교실이 망가지는 걸 보기가 싫어서-지도교수는 그걸 내가 모교에 남으려고 하는 공작으로 보는 듯했다. 그런 굳건한 신뢰를 바탕으로 천씨는 결국 교수가 되었다. 그녀의 성공은 실력이 없어도, 그리고 인간성이 나빠도 윗분들에게만 잘보이면 성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세상에 던져줬다. 교수가 되고나서 한층 더 기세등등해져 아랫사람을 조지는 천씨에게 별 의미없는 한마디를 던진다.
“어릴 적 배운 건데, 정의는 결국 승리한데!”
PS: 심복과 술을 마시는 내내, 친구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맨날 단란주점에 가자고 해서 내가 피하고 있는 그 친구들. 결국 난 2차를 마치고 그 친구들과 합류했다. 단란주점에는 가지 않았지만 여자가 서빙을 하는 겁나게 고급스러운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데, 석달간 내가 도망다닌 죄를 물어 계산을 하란다. 했다. 그리고 난 장렬히 파산했다. 뭐가 그렇게 비싼거야, 제길. 앞으로 다시 석달간, 그들을 피해다닐 생각이다. 오래 안봐서 그런지 그들과 있는 게 재미도 없었다.
PS2: 금요일은 쉴 수 있을까, 생각하는데 문자가 왔다.
“민아, 내일 바빠? 술이나 한잔 하자”
이번주를 퍼펙트로 마실 것 같다는 내 예감은 불행히도 맞았다....
PS3: 아드리안 벨트레는 LA 다저스에서 활약 중인 야구선수입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