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일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가족들이 사령관이었던 도조 헤이하치로가 배에서 내리는 걸 보고 항의차 달려갔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가 자신의 세 아들의 주검을 수습하고 있었기 때문. 이런 얘기는 일본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모택동의 아들인 모안영...한국전 참전 당시 신혼이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말렸지만, 모택동은 "그가 안가는데 누가 간단 말인가"라는 말로 반대를 일축하고 아들을 전쟁터에 내보냈다. 모안영은 11월 25일 공습으로 사망했는데, 모택동은 그 사실을 3개월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158-159)]
강준만의 역작인 <한국현대사 산책>을 읽다보면 분노, 슬픔, 허탈 등의 감정이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걸 느낀다. 우리 현대사는 왜 이리 지지리 못났는지에 대해 분노하게 되고, 분노가 고조되다 보면 허탈함이 밀려온다. 하지만 50년대를 읽으면서 느끼는 분노의 크기는 70, 80년대와 비할 바가 아니다. 6.25와 함께 시작된 50년대 내내 우리나라는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전쟁 때문이 아니다. 이 나라 지배층들의 한심한 작태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한강다리를 끊고 도망간 이승만도 그렇지만, 나머지라고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위의 책에서 인용한다.
[부산에 결집한 상당수 고위층과 부유층 인사들은 배를 부산항에 대놓고...일본으로 탈출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미 일부는 제주도로 피난간 상태였다 (105쪽)]
김두한은 결국 이 배들을 수색하는데, 그때의 놀라움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들의 선실을 뒤졌을 때 그들의 화려함에 놀란 정도가 아니라 기절할 뻔했다. 군대에 가야 할 적령기에 있는 젊은이가 여인들가 춤을 추고 있었고, 외래품으로 몸을 감은 그들은 양주병을 앞에 놓고 엔조이에 한창들이었다 (106쪽)"
[임시수도 대전에 머물렀던 각료들은 인민군이 평택까지 쳐들어 왔다는 소문을 믿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전주로 도망을 갔다가 그게 사실이 아닌 걸로 밝혀지자 다시 대전으로 돌아왔다. 그 한심한 작태에 분노한 여관집 주인이 그들의 투숙을 거부했으니,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대전 성남장 사건이다(65쪽)]
강준만은 이렇게 말한다. "이는 해방정국에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친일파를 위주로 기능적 효율성만을 따져 기용해선 안될 이유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지배집단은 일제시기에 그랬던 것처럼...자신과 자기 가족 챙기기에만 바쁜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전쟁 중인 와중에 각 도에서 국립대학 설립이 추진되는 희한한 일까지 있었다. 왜 그랬을까? 대학생들에 대한 징집 연기조치가 취해졌기 때문에.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과연 어떠한 계층의 사람들이 대학을 다닐 수 있었겠는가...기득권 계층이 그들의 자제에게 병역기피의 수단으로 악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은 아닐까. 교사와 고등학교 재학생마저도 전쟁에 지원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과연 전시에 대학생이 증가한 것은 바람직한 일일까? (267쪽)]
사정이 이러니 한국군은 전장에서 죽을 때 "빽!" 하면서 죽었다는 얘기가 나돌았을 것이다.
이 현상에 대한 내 친구의 설명이다.
"우리나라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안되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봤을 때 우리나라에는 서양과 같은 귀족계급이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공작, 백작 등의 타이틀만 붙지 않았을 뿐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기득권 세력은 대대로 권력을 세습해 왔고, 나라가 망한 와중에도 친일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유지했다. 해방 이후에도 살아남은 그들은 정권이 바뀌는 와중에도 굳건히 버티며 사회의 주류로 행세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귀족이 없어서라는 친구의 말은 틀렸다. 그렇다면 왜? 아마도 민중의 감시가 소홀한 결과일 것이다. 서양 귀족들이 우리 지배층처럼 행동했다면, 귀족 신분을 유지하지 못했을 거다. 그럼 이제부터라도 감시를 잘 한다면 나아질까? 물론이다. 하지만 그 감시의 선봉에 서야 할 언론들도 그리 건강하지 못하다. 우리나라 안보를 책임지는 조선일보사 사장을 필두로 언론사주 자제의 많은 수가 병역 미필자라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리고 지난 세무조사 때 밝혀진 엄청난 탈세규모로 볼 때, 그들이 과연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말뜻이나 아는지 궁금하다. 이런 생각을 하니 우울해진다. 우리에게 과연 희망은 있는가?
*제가 원래 언론개혁만이 살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라, 결론이 황당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 그리고...전 재벌2세 중 유일하게 군대를 다녀왔습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