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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바이러스
진중권 지음 / 아웃사이더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난 진중권이 쓴 책을 모조리 읽었다. 이쯤되면 팬이라 할만하다. 거기에 더해, 진중권은 내가 책을 살 때 가슴을 뛰게 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대통령과 xxx>의 작가를 제외한다면 내가 누군가의 책을 사며 설레이는 일은 꽤 드문 일이다 (당연하지! 내 책이니까!!!!)
그는 수구 세력들의 허구성을 예리한 풍자로 파헤치는 데 최고의 전사이며, 무릎을 칠만한 비유와 유머가 동반된 그의 글은 유익함과 더불어 재미까지 있다. 예컨대 다음 대목을 보자. "교수대의 뻣뻣한 밧줄을 부드러운 실크로 대체해 놓고, 사형 제도의 문제점을 극복했다고 자랑하는 격이다" 정말 멋진 비유 아닌가? 이런 아름다운 비유를 할 수 있는 사람, 우리나라에 그리 흔치 않다. 하지만 가끔 그의 글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있다. 그 자신도 인간이기에 실수를 할 수 있을텐데, 그는 자신을 무오류의 인간인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자신에 대한 비난들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시대를 너무 앞선 나머지 당대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비범한 생각이라도 가지고 왕따를 당한다면 모르겠다...평범한 상식을 말하는 이가 이상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사회, 내게는...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처럼 낯설게 느껴진다(192쪽)" 어느 사회나 왕자병은 왕따의 대상이건만, 그는 그걸 모른다.
그에게는 사실을 왜곡해서 자기 편한대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한번 그렇게 생각하면 상대방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아무리 빌어도 소용이 없다. 그리고 그는 그걸 수도 없이 재탕한다.
[군부 독재자들이나 떠드는 그 얘기를 다시 듣게 된 것은...어느 신방과 교수를 통해서였다. 그는 광주 시민의 정치의식을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했다. 광주는 김대중과 민주당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야지, 거기서 그 이상의 진보성을 기대하지 말라는 애기다(336쪽)]
그 신방과 교수는 다름아닌 강준만이다. 그의 모든 저작을 읽은 나로서는, 그의 말이 진중권이 해석한 것과는 전혀 다른 뜻이라는 걸 안다. 들뢰즈도 우습게 읽어내는 위대한 미학자가 나도 이해하는 말을 저렇게 곡해하는 이유가 뭘까? 너무 쉬워서? 거기서 더 나아가 진중권은 이번 총선에서 노혜경이 낙선한 것을 "너무 쉽게 자기를 버렸기 때문"이라고 비아냥댄다. "권력과 대중과 미디어가 씌워주는 아우라에 취해 살다" 보니 자신을 잃었다나? 노혜경의 낙선은 지역감정에 의한 것이건만, 이 무슨 해괴한 해석인지 모르겠다.
진중권은 예전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강준만이 호남차별에 저항하고, 장애인 인권을 옹호하며 서울대 패권주의를 비난하는 것은 김대중이 호남 사람이고 장애인이며 고졸이기 때문이라고. 이토록 어이없는 글을 썼던 그가 지금 와서 이런다. [...그때 강준만이 그 비판을 제대로, 정식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오늘날처럼 형편없에 무너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정작 무너지는 게 누군지 모르겠다. 요즘 그가 쓰는 책에서 강준만에 대한 비난이 없는 건 미학 관련 책밖에 없는 것 같은데, 형편없이 무너진 사람을 왜 자꾸 욕하는 걸까?
그는 2년 전 서울시장 선거의 옥석논쟁을 다시금 끄집어내고, 김민석의 철새 행보를 지적한다. "과연 이런 후보를 지지할 가치가 있었을까?" 김민석이 철새 행각을 벌인 것은 선거 이후고, 그가 그렇게 변절하리라는 걸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강준만이 김민석을 지지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문옥과 김민석 중 누가 훌륭하냐는 진중권의 물음에 강준만은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난 전주에 살아서 서울시장에 관심이 없다"라고. 당시 여론은 김민석이 되면 노무현도 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논리를 진중권이 비판하자, 강준만의 대답은 이랬다. "그렇게 믿는 사람이 많은 걸 어쩌겠느냐" 하지만 진중권은 이 책을 통해 강준만을 비판한다. [당시 강준만이 주장한대로 지방선거의 결과가 어디 대선 결과로 이어지던가?] 참으로 갑갑하다. 남이 하지도 않은 얘기를 가지고 상대방을 비난하다니, 이런 상대와의 논쟁이 생산적이 될 수 없을게다. 진중권같은 스타가 인터넷에도 출몰해 싸움질을 하고 그러는 것은 충분히 존경받아 마땅하지만, 그런 싸움 속에서 스스로 피폐해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책의 90%를 너무도 재미있게 읽었으면서, 마지막 십여 페이지에 실망해 비난 일색의 리뷰를 남겨야 하는 게 마음이 아프다. 남들의 비난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번쯤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안한다 해도 그는 언제나 내 스승이고, 난 그의 책을 나오는대로 사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