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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ㅣ 진중권 미학 에세이 2
진중권 지음 / 아트북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아는 미학은 전부 진중권에게서 배운 거다. 그는 내가 아는 가장 탁월한 미학자이며, 그 어려운 미학을 나같은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해 주는 좋은 스승이다. 난 그의 책을 좋아한다. <현대미학 강의> 역시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빨간 줄을 빡빡 그어가면서. 그의 책은 다른 이에게 자랑하고 싶게 만든다. 책을 다 읽고난 김에 친구에게 말했다.
나: 요즘 나오는 작품들을 보면 뭘 말하는지 모르겠지? 너 현대미술이 왜 어려운 줄 알아?
친구: 몰라.
나: 그건 말야, 예술이 대중에게 충격을 주는 걸 목표로 하기 때문이야.
친구: 왜 충격을 주는데?
나: 복제의 시대는 특이한 것도 규격화해서 대량생산해 버리거든. 예술은 거기서 탈주하려는 거야. 즉, 현대예술은 의미를 파괴하고 소통을 거부함으로써 사회에 저항하는 거지.
친구: 야, 너 더위 먹었냐? 술이나 마셔!
책을 읽어서 좋긴 하지만, 그건 나 자신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아, 내 친구들은 왜 이렇게 무식한 걸까. 같이 술을 마시던 4명 중 세명이 들뢰즈를 모르는데, 내가 그들과 무슨 얘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책을 읽는 것이 자기 소외를 한층 심화시킨다면, 난 왜 책을 읽는 것일까. 하긴, 나도 그리 유식한 건 아니다. 이 책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난 그가 데카르트의 합리론에 맞서 경험론을 주장한 영국 학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런 말이 나온다. "베이컨의 회화는 폭력적이다" 그 사람이 그림도 그렸나? 하여간 옛날 사람들은 재주도 많지. 하지만 결정적으로 베이컨이 그림을 그린 연대가 1969년-투우 습작-이다. 그때 알았다. 그 베이컨이 저 베이컨이 아니라는 걸. 도대체 세상에는 몇 명의 프랜시스 베이컨이 있는 걸까.
위에서 난 친구들이 들뢰즈를 모른다고 했다. 그럼 난 아는가? 이름은 들어봤으니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닐 게다. 최소한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 정도는 알아야 할 게다. 그의 말들을 읽어본 적은 있지만, 머리 속에 남아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 책에 나온 그의 말이다. '너희 자신의 기관 없는 몸체를 찾아라. 그것을 만드는 법을 알아라. 이것이야말로 삶과 죽음의 문제, 젊음과 늙음, 슬픔과 기쁨의 문제다"
무슨 말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그는 왜 모든 말을 이다지도 어렵게 하는 걸까. 이러니 듣고 바로 잊어버릴 수밖에. 어렵게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잘 몰라서 그런다고 하지만, 설마 대 철학자인 들뢰즈가? 한때 내공을 좀더 쌓아서 들뢰즈랑 라캉 같은 사람의 책을 읽어볼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처럼 산다고 내공이 쌓이는 것도 아닐 것이며, 그렇게 해서 들뢰즈를 읽어 버리면 내 친구들과의 소외는 한층 더 심화되지 않겠는가. 난 들뢰즈를 모른다. 그리고 들뢰즈는 들뢰즈의 삶이, 내겐 내 나름의 삶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