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TX에는 좌석마다 같은 이름의 잡지가 놓여 있다. 많은 이들이 그 잡지를 뒤적인다. 미처 읽을거리를 준비하지 못해 다른 볼거리가 없으니까. 고정 독자층이 있어서 그런지 그 잡지는 무지하게 재미가 없다. 그러니 더 재미없게 만든다 해도-그게 가능하기나 한지 모르겠지만-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 잡지에 광고가 실리는 건 순전히 그거 하나를 믿기 때문이리라. 충실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외면을 받는-<말>처럼-잡지에 비하면 <KTX>는 분명 행운아다.
호기심이 일어 7월호를 폈다. 휴가지의 진실, 살바도로 달리 특별전에 대한 정보, 로마, 다도해 여행...
그리도 재미없는 잡지를 만드는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그들도 나름대로 꿈과 희망이, 더 나은 잡지를 만들고자 하는 소망이 있긴 할까? 기자들 스스로는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그런 마음이 있다면 그 잡지를 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지금처럼 따분하지 않을 테니깐. 마음이 있는데 재능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잡지 만드는 일이 굉장히 괴로울 것이다. 자신이 잘 하지도 못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으니까.
차라리 <시네21>처럼 대중적인 잡지를 왕창 구독해 좌석마다 꽂아놓으면 어떨까? 그러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알라딘에 로얄티를 주고 그 중에서 맘에 드는 글을 싣는 거. 예컨대 이런 글 말이다.
[그녀들 셋이 술을 먹었다.
술을 몹시 즐기는 편이라 소주-맥주-소주-맥주, 스탭밟듯 먹다보니 거나하게 취했다.
자정이 넘어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가는 길, 흥에 겨워 큰 소리로 서로 욕을 하자
택시기사분은 라디오볼륨을 높였다.
아저씨도 신이 났다.
때마침 머라이어 캐리의 'Without You'가 흘러나왔다.
아저씨가 선창하자 그녀들도 따라불렀다.
더 이상의 머뭇거림도 없이 목청껏 노래를 합창하며 일체감의 극을 달리는 순간
코너를 돌다 방심한 기사아저씨,
앞차를 들이받았다.
급정거로 차가 멈춰서자 휘청 목이 꺽였지만
이미 얼큰 취한 그녀들, 목적지에 도착한 줄 알고 지갑을 주섬주섬 꺼내는데
아저씨는 이천원을 쥐어주며
"거의 다 왔어, 어여 가~"
구슬리듯 말했다.
택시비를 받기는 거녕 되레 돈을 쥐어주자 갑자기 정신을 차린 그녀들.
차츰 안개속 같던 눈앞이 거치고 그녀들 앞의 상황이 파악되었다.
나중에 그녀들은 진술했다.
"만약 그때, 그 아저씨가 미안하다고만 했어도 우린 안 그랬다니까~! 정말이라니까~!"
그녀들의 평소 행태를 아는 사람으로선 콧방귀 풍풍 낄 말이지만
그녀들은 진심이라 했다.
그러나 기사아저씨는 백옥같은 그녀들의 마음을 간파하지 못했고
결국 그녀들은 그 길 한복판에 드러누워 버렸다.
아저씨는 팔다리를 잡고 일으키려 했지만
장정같은 그녀들을 일으키기란 기중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경찰이 오고 사태가 커지자
교통사고전문병원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학동사거리 **병원에 나란히 입원한 그녀들.
밤이면 병원 바로옆 정비소가 운영하는 포장마차에서 거나하게 술을 마셔 나라경제에 이바지하고
낮에는 물리치료와 보험회사직원의 급작스런 등장에 대한 긴장감으로 피로하진 심신을 뉘었으며
'교통사고났다'는 말에 속아(심심하면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했다)
간간히 문병온 이들이 가져온 음식물들을
병실의 환자들과 나눠먹는 넉넉함을 발휘했다.
함께 입원한 아주머니도 그녀들과 함께 낮에는 부족한 수면을 취했다가
밤이면 노랗게 염색한 머리에 화이바를 쓰고 오토바이로 야식배달을 나가셨다.
결국 이주간의 지루하고 고단했던 입원을 참아낸 결과 백만원이 넘는 보험금을 받아
그 길로 태국행 비행기표를 끊어 세상에 대한 눈을 넓히는 계기로 삼았던 그녀들.
그녀들은 내 친구다.
http://www.aladin.co.kr/foryou/mypaper/498277]
이 글 다음에 자연스럽게 태국 여행에 관한 정보를 쓴다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마냐님의 리뷰도 좋고, 다음 사진도 얼마나 귀여운가.

이런 글들이 <KTX> 지면을 장식한다면 기차에 탄 사람들도 지루해하지 않을테고, 기자들은 뭘 쓸까 머리를 짜내지 않아도 될테니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재미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재미없는 잡지는 범죄다. 그게 아무리 무가지라 해도.
* 아차, 제가 출처를 명기하지 않았군요. 사진의 인물은 책나무님의 아들 성민이로, 변기에서 힘을 주고 있는 중입니다. 여러 억측을 불러일으킨 데 대해 사과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