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수같이 내리던 비를 바라보던 중 정말 기가 막힌 얘기가 떠올랐다. 기생충에 걸린 조선시대 왕들의 얘기를 쓰는 거다. 예를 들어 연산군은 뇌를 침범하는 유구낭미충증에 걸린 덕분에 행동이 이상해졌고, 소현세자는 말라리아에 걸려서 죽었다는 식의.”
하지만 이런 얘기는 책으로 나오지 못한다. 쓰기 전엔 재미있을 것 같은 얘기도 막상 쓰고보면 별반 재미가 없고, 더 중요한 건 조선 왕들을 다 뒤져봐 봤자 기생충과 연관시킬 건덕지가 별로 없으니까. 억지로 이런 얘기들을 써낸다 해도 이런 책을 내줄 출판사는 찾기 힘들다. 더구나 저자가 여러 출판사를 힘들게 했던 나니까.
소설이 아닌 한, 요즘 잘나가는 책들의 상당수는 출판사의 기획에 의해 탄생한다. 그들은 시대의 트렌드를 누구보다 잘 알고, 그 저자에게 맞는 컨셉을 잡아주니까. 처음엔 ‘그렇게 쓴 건 내 책이 아니야!’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막상 책이 나오고 난 뒤에는 누구보다도 그 책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것이다. 자기가 쓰려던 책보다 그 책이 훨씬 훌륭하다는 걸 자기가 제일 잘 아니까 말이다.
<걸작의 공간>에 대한 소개글을 봤을 때, ‘이거 기가 막힌 기획이군!’이란 생각을 했다. 작가가 태어나고 글을 쓰던 장소를 독자들에게 보여준다니. 더구나 그 작가들이 로버트 프로스트, 헤밍웨이, 호손, 루이자 메이 올컷 등등 당대의 명 작가들이니, 독자의 구미가 동할 수밖에. 이런 멋진 기획은 예일대 교수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다. 필시 시대의 흐름을 아는 출판업자가 기획한 것이리라. 하지만 막상 책을 주문하려 할 때는 잠시 망설일게 된다. 책값이 무려 26,000원이니, 어지간한 책 두 권 값이다. 이런 망설임은 억지로 주문을 하고 책을 받은 뒤 깨끗이 사라진다. 독자가 보면 좋아할 만한 멋진 사진들이 책을 가득 메운 걸 보면, 책값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직접 갈 기회를 잡기가 어려운 현실에서, 이 책은 독자에게 상당한 만족감을 줄 것 같다.
이 책의 위력은 아내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강남좌파>, <헤드헌터> 등등 내가 주문하는 책들에 대해 시종 시큰둥한 모습을 보이던 아내는 이 책을 보자마자 반색을 하더니 “내가 먼저 읽을 거야!”라며 손도 못대게 했다. 아내가 야구를 보는 사이 몰래 머리말을 읽어보니, 재미있는 구절이 나온다. 작가들의 집이 제대로 보존되기 어려운 이유를 설명하면서 저자는 식당 주인의 말을 인용해 놨다. “전 그 집이 좋아서 샀어요. 사람들이 그곳이 존 스타인백의 집이었다고 했을 때 전 ‘그래서요?’라고 했습니다.” 이건 책을 좋아하는 기괴한 습관을 가진 ‘우리’끼리만 하는 얘기지만, 정말 웃기지 않는가? 스타인백의 집이라는데 ‘그래서요?’라니!
아내의 눈치를 보느라 딱 한 작가의 얘기만 읽었다. 헤밍웨이 편인데,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헤밍웨이는 인간으로서 해도 너무한 삶을 살았다. 작가는 작품으로 평가해야겠지만, 그가 만일 남자가 아닌 여자였다면, 그 행적으로 인해 그의 작품들도 묻혀 버렸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사슴 박제가 있는 헤밍웨이의 작업실을 보면 ‘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생각보다 훨씬 멋지고, 앉아 있으면 절로 글 소재가 떠오를 것 같아서. 아내가 빨리 이 책을 읽기를 기다려야지. 다른 작가들의 작업실도 궁금하니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