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날에 <더티댄싱>을 본 적이 있다. 그 전날이 무슨 시험이라, 한숨도 안자고 밤을 샌 나는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옆에 여자에게 미안해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안자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패트릭 스웨이지가 여자를 비행기 태웠을 때, 다른 사람들은 다 감동받은 눈치였지만 난 저게 도대체 무슨 장면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만 영화가 끝나서 무지하게 기뻤던 기억은 난다. 나중에 나 혼자 그 영화를 다시 봤는데, 영화의 내용도 다 이해가 갔지만 무엇보다도 비행기 장면이 너무 감동적이라 눈물이 날뻔했다.
<스파이더맨 2>를 본 것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십오년전에 뒤지지 않는 미녀와 영화를 봤음에도, 또 졸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것이, 워크숍 이틀간 총 7시간을 못잔 상태였고, 난 잠을 못자면 생활이 안되는 놈인지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잘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난 내 따귀를 때려가면서, 가슴을 꼬집어가면서 안자려고 노력했다. 그러니 문어발로 무장한 박사가 아무리 설쳐대도, 스파이더맨이 빌딩 사이를 날라가거나 존재론적 고민을 해도, 그게 마음에 와닿을 리가 있는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교훈은, 영화를 재미있게 보는 방법은 전날 잠을 충분히 자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재미있는 영화도 잠에의 욕구를 이길 수 없는 법, <해리포터>를 볼 때는 전날 10시간 이상 자야겠다.
그래도 영화 중간중간 노트에 끄적거린 게 있는데, 그걸 몇 개만 옮긴다. 스파이더맨은 계속 MJ라는 여자 주위를 맴도는데, 한겨레에 의하면 왜 그러는지 전혀 모르겠단다. 즉 안이쁘단 얘기다. 1탄에서도 그랬지만 나 역시 "쟤 뭐야?"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봤는데, 1탄보다도 더 매력이 없어진 듯하다. MJ 대신 흥행에 굶주린 안젤리나 졸리를 썼다면 훨씬 더 공감했을텐데.
영화에서 MJ는 피터(스파이더맨의 이름)에게 키스를 해주려다 갑자기 중단한 뒤, "나 요즘 만나는 남자 있어"라고 선언한다. 그건 질투심을 유발시킴으로써 자신에게 관심을 더 쏟아주기를 바랄 때 쓰는 수법인데, 목적이야 좋지만 수단으로 이용되는 남자가 영 불쌍했다. 잘생기고 특별히 나쁜 점도 없는 그 남자는 결국 MJ 때문에 큰 상처를 받게 되는데, 인간이 그러면 안된다. 피터가 고백을 안한다면 자기가 먼저 사랑한다고 하면 되지, 왜 남을 이용한담? 그 남자 역시 나름대로 귀한 자식인데.
MJ를 거부하면서 피터가 하는 말, "나 때문에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난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거야" 이 대사를 보니 사회 정의를 위해 애쓰는 영웅은 애인을 만들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보면 내가 손에서 거미줄이 나오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모든 여성이 다 내 잠재적 연인이니 말이다. 음하하하. 가만, 아니다. 손에서 거미줄이 나오면 여자를 꼬시기가 더 좋잖아! 영화 속에서 스파이더맨이 할머니를 구한 뒤 땅에 내려놓자 뭇 여자들이 달려든다. "나도 데려가줘요!"라고 외치면서. 하지만 말없이 하늘로 올라가는 스파이더맨, 그런 유혹을 이기는 자만이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난 등에 업었던 할머니를 땅에 내려놓아도 "나도 업어줘요!"라고 달려들 여인들이 없다. 영화에선 스파이더맨이 쓸쓸한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 세계에선 평범한 인간이야말로 고독한 법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선 3탄을 만들겠다는 굳은 의지가 보이는데, 글쎄다. 이제 그만 좀 하지, 더 우려먹을 게 남아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