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교 때, 난 제법 성실한 아이였다. 조교들이 다 그렇지만, 난 아침 7시 경에 이미 학교에 왔고, 밤이 늦어서야 퇴근을 했다. 어느날 아침, 난 학교 구석에서 <Recombinant DNA>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 뭔가 낌새를 챘는지 선생님이 방에 들이닥쳤고, 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선생님의 말이다.
"일찍 왔으면 내방에 와서 커피도 타고 그래야지, 여기서 뭐해?"
"DNA? 이런 책이나 읽고 있구... 도대체 생각이 있는거야?"

근무시간 전에 와서 공부하는 게 왜 잘못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선생님이 나가신 후 가출했고, 난생 처음으로 만화방에 갔다. 3천원만 내면 하루종일 버틸 수 있었던 그곳에서 난 무려 여덟시간 동안 만화를 봤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죄송하다고 하니까 그 아래 선생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번만 봐주는 거야!"
그때 만화의 매력을 느낀 나는 그 뒤부터 일년에 한두번은 만화방에 가서 하루종일 죽치고 있는다.

-발령을 받으려면 논문 점수가 어느 정도 되어야 했다. 부지런히 논문을 써둔 탓에 대학에 응시했던 99년 내 논문점수는 기준을 몇배나 초과하고도 남았다. 그러니까 그땐 "나이에 비해 논문이 너무 많았다"
5년간 놀았더니 상황은 반전되었다. "논문에 비해 나이가 너무 많다"

-면접을 볼 때 10분간 학생 강의를 해보라고 했다. 다른 과목 선생님들이 현란하게 강의를 했고, 드디어 내 차례였다. 강의가 끝나자 아무도 박수를 안쳤는데, 학장님이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마지못해 따라했다. 심사를 맡았던 선생님 한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일대 일이라고 너무하네!"
난 지금도 그때 했던 수준의 강의를 한다.

-교수들이 오래 안있고 다 서울로 떠버리는 우리 학교, 3년 전인가 숫자도 별로 안되는 기초에서 무려 4명이 그만뒀다. 환송회 자리에서 학장님이 하신 말, "있어야 할 사람은 가고, 가야 할 사람은 남는다"
난 그게 내 말인 것 같아서 괜히 찔렸는데, 학장님도 너무했다 싶었는지 날더러 이런다.
"서선생, 서선생은 제발 좀 오래 남아 있어요"
내가 대답했다. "저, 내년에 잘릴지 모르는데..."
학장님의 답, "내가 서선생 정년은 보장할게!"
학장님은 그날 그 말씀을 세 번이나 했는데, 거기에 혹한 나는 2차를 쐈다. "정년도 보장받았는데 제가 사야죠, 음하하하!" 다음날 술이 깨고 난 뒤 학장님은 그 말을 한 자체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며, 더더욱 황당한 것은 학장님이 술값도 당신이 낸 걸로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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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29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우맘 2004-05-29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장님께 제가 제보전화 한 통 넣어드릴까요??
(코 움켜쥐고)'그 날 밤 이 차는 성실하고 똑똑한 서선생이 냈습니다.'

panda78 2004-05-29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마태우스님, 마지막 두 줄이 너무 슬퍼요-- TㅂT

플라시보 2004-05-29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저 역시 전화 한 통 넣어드리죠.
(코 움켜잡고) '그리구요. 학장님께서 서선생의 정년을 보장하셨더랬어요. 뭐 서선생이 관두면 학장님도 관두겠다고 혈서까지 쓰셨고 서선생이 그걸 액자에 넣어서 자기 방에다 걸어뒀다는데요?' 흐흐.

2004-05-29 1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weetmagic 2004-05-29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041)550-****,학장님 하고 통화했는데요. 기억하고 계시다네요. 뭐 걱정하지 마세요.

작은위로 2004-05-29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이런. 어째요. 괜찮아요. 학장님이 쑥스러워서^^;;;
모른척 하신걸걸요? 후후후

호랑녀 2004-05-29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 플라시보님, 코 안잡아도 학장님은 님들이 누군지 모르지 않나요? ^^
코를 잡으시려면 마태님이 잡으셔야지...

starrysky 2004-05-29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녀님께 몰표!!! ^____^ 마태우스님 너무 불쌍. ㅠㅠ
근데 그 병원 좋은데 왜 다들 떠나신대유? 서울에서 멀어서 그런가?

마태우스 2004-05-30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주변에 백 있는 분들이 이리도 많군요. 호호, 내년에 잘릴 걱정 안해도 되겠다...
starry sky님/불쌍해 하지 마세요. 맨날 술먹고 노는데 붙어있는 게 기적이죠...
호랑녀님/그게 꼭 알아야 백이 통하는 게 아닙니다. 미인계라는 게 있잖습니까. 학장님은 참고로 남자입니다.
작은위로님/쑥스러워서 그런 것 같지 않지만...그렇다고 생각하죠 뭐.
sweetmagic님/휴, 다행이다. 술값 그냥 날린 줄 알았는데...
플라시보님/그건 좀... 왠지 공갈협박같아서 영 꺼림직...
진우맘님/제가 똑똑하지도, 성실하지도 않은 거 님도 잘 알면서... 그렇게 전보 치면, 서선생이 전줄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panda78님/제 컨셉이 원래 동정심 유발입니다. 매우 성공적인 듯 보이네요.^^

비로그인 2004-05-30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장님이 쑈하는거 아닙니까? 한번 더 얻어 드실라고? 아님 정년까지..꽁짜로!!!!!!!!!보장 받을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