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멧돼지

작년 12월 중순경, 몇 명의 환자가 우리 병원에 왔다. 환자들은 열과 함께 얼굴이 붓고 근육에 통증이 있는 등의 증상을 호소했다. 환자들은 모두 같은 회사에 다니는 30-50대의 남자들이었다. 병원에선 이렇다할 진단을 내리지 못하던 차, 환자 한명의 아내가 자기 남편이 한달쯤 전에 회사 사람들과 함께 멧돼지 바비큐를 먹었고, 증상이 나타는 이는 육회를 먹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 기생충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분노의 검색질”(이건 그 아내의 표현이다)을 한 끝에 “선모충과 가장 유사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그녀는 경향신문에서 알아낸 내 메일주소로 장문의 글을 띄운다. 그게 1월 1일이었다.
그녀 말이 맞았다. 그들은, 멧돼지 바비큐를 통해 선모충에 감염된 거였다. 선모충에 걸린 10명 중 우리 병원에 입원한 환자는 총 8명. 일반인이 인터넷 검색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건 쑥스러운 일이었다. 선모충은 멧돼지 등 야생동물을 통해 감염되는 기생충으로, 주로 동물의 근육에 기생하다가 고기를 날것으로 먹는 사람에게 전파된다. 사람에 들어가도 근육으로 가서 근육통과 부종을 비롯한 각종 증상을 유발하니 확진을 위해선 사람 근육을 생검해 선모충을 발견해야 하지만, 약을 먹으면 낫는 질환에 근육생검을 한다는 건 환자에게 너무 잔인한 일이고, 마릿수가 적은 경우 근육을 떼어 본다고 발견된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서 하는 게 바로 혈액 속에 항체를 확인하는 방법. 이번 경우에도 환자의 피를 뽑아 항체검사를 실시했고, 선모충 감염임을 확진할 수 있었다. 선모충은 크게 봐서 회충과 같은 종류에 속하므로 회충약을 먹음으로써 치료가 가능한데, 이번 환자들 역시 2주간 회충약을 먹고 완치가 됐다.
2. 선모충
사진: 근육 안에 있는 선모충의 유충
선모충은 야생동물의 고기를 즐겨먹는 나라에서 흔히 발생해, 발칸반도 부근을 비롯해서 세계 곳곳에서 유행하고 있다. 빈도수가 그렇게 많은 건 아니지만 이번 경우처럼 한번에 열명 가량의 환자를 발생시키므로 관심의 대상이 된다. 일본에서도 선모충이 여러번 발생했지만 아시아에서는 태국과 중국이 주 유행지다. 특히 중국은 많은 인구 때문인지 선모충 발생이 잦아, 지난 40년간 2만명이 선모충에 걸렸고, 그 중 200여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희한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한번도 선모충이 발생한 적이 없었는데, 그러던 1997년 선모충 감염례가 국내 최초로 확인됐다. 산에서 오소리를 구워먹은 다섯명이 얼굴이 붓고 열이 나고 근육통이 있는 등 선모충의 증상을 보였고, 이들은 근육생검을 통해 선모충증으로 확진이 됐다. 굳이 근육생검을 한 이유는 우리나라에 선모충이 한번도 발생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해서 확진을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리라. 그로부터 4년 후 강원도 인제의 산악지역에서 멧돼지를 잡아먹은 사람들이 선모충에 걸렸다. 그러니 이번 증례는 우리나라에서 선모충의 세 번째 발생이라 할 수 있는데, 기생충에 대한 안목이 있는 의사가 그리 많지 않음을 감안하면 그 전에도 걸린 사람들이 있었지만 보고가 안된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본다.
3. 야생동물
사진: 오소리
그렇다면, 우리나라 오소리나 멧돼지엔 과연 얼마나 많은 선모충이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이에 대한 자료는 전혀 없는 실정이다. 그런 거 알아서 뭐하냐, 날고기 안먹으면 되는 거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나라는 야생동물에서 선모충 감염률을 조사한 자료가 많이 축적되어 있다는 걸 감안하면 좀 아쉬운 대목이다. 하기야, 선모충이 발견된 게 비교적 최근의 일이니 의욕을 가지고 연구하는 학자가 없었던 것도 이해가 된다. 물론 연구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수의기생충학을 전공하는 한 분이 축사에서 기르는 돼지 800여마리의 항체 검사로 선모충 감염 여부를 진단한 적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단 한 마리의 선모충도 나오지 않았는데, 그게 당연한 것이, 선모충은 이 기생충에 감염된 동물의 근육을 먹어야 걸리는데, 사료를 먹여 기르는 돼지에서 선모충이 나올 리는 없다.
그 전까진 별 생각이 없었지만, 이번에 선모충 환자들을 경험하면서 나라도 연구를 해보자는 데 생각이 미쳤다. 강원도의 산에 있는 야생동물을 잡아 선모충 검사를 하는 것. 이번 2월이 연구재단에 연구비를 신청하는 기간이라 이 주제를 가지고 계획서를 썼다. 이걸 쓰는 데 나흘이나 걸렸던 건 정말 심혈을 기울여 연구비 신청서를 썼기 때문이다. 요즘 연구재단-구 학술진흥재단-에서 연구비를 따는 건 4대 1에서 10대 1까지의 험난한 경쟁률을 뚫어야 하니까.
4. 예상되는 문제점들
이 사진은 본문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난관을 극복하고 연구비를 딴다고 해도 문제가 있다. 3천5백만원의 연구비를 탄다 해도 그 돈으로 멧돼지를 몇 마리나 조사할 수 있을까? 최근 나온 프랑스 논문을 보니 멧돼지 1,881마리와 여우 74마리를 조사했던데 이 정도 해야 그래도 통계적으로 유의성이 있는가보다. 어떻게 알게 된 업자한테 물어보니 멧돼지 한 마리당 50만원을 쳐주면 협조를 하겠다고 한다. 오소리도 50만원, 족제비는 30만원, 이런 식으로 대충 가격협상을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많은 동물을 조사하진 못할 것 같다. 그냥 한국에서 최초로 야생동물을 조사했다는 데 만족해야 하려나보다. 두 번째 문제. 선모충을 전혀 발견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최소한 한 마리에서라도 찾아야 의의가 있고, 그래야 논문도 쓸 수 있는데 말이다. 참고로 아까 언급한 프랑스 논문에 의하면 멧돼지의 2%에서만 양성이 나왔다니 더더욱 걱정이 된다. 세 번째 문제. 업자에게 얘기해서 일을 시작해 놓긴 했는데 연구비 경쟁에서 탈락하면 어떡하나? 사실 이게 가장 큰 문제로, 그 경우 내 돈으로 연구를 해야 한다. 동물 마리수는 더 줄어들어야 하며, 한 마리도 발견 못할 경우 논문도 못쓰고 돈만 날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정말 생각하기 싫은 사태다.
어제, 업자에게서 전화가 한통 왔다. 오소리를 잡았다고, 가지러 오라고. 오늘 대전에서 무슨 발표가 있어 다른 분을 보내서 좀 가져와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일단 내 계좌에서 50만원을 보냈다. 4월 말 연구비 결과가 발표될 때까지, 난 좀 추운 봄날을 보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