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늘까지 기독교방송에서 아이템 하나를 만들어 제출하랍니다. 그래서 원고를 써서 보냈고, 이건 그걸 정리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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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가면 가운입은 사람이 많다. 사람들은 가운만 입으면 다 의사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아니다. 의사보다 더 많은 수의 보조인력이 있으며, 의사라고 해도 다 같은 의사는 아니다. 가운에 무슨무슨 과, 예를 들면 소아과, 내과 이렇게 씌어 있으면 레지던트, 그냥 의사라고만 씌어 있으면 인턴이다. 아직 과를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써있고 좀 어리버리해 보인다, 그러면 실습나온 학생이다. 내가 실습할 때만 해도 가운을 입고가면 의사로 알고 "선생님" 소리를 했는데, 요즘 환자들은 학생이 오면 귀신같이 알아내며, 귀찮다고 협조도 잘 안해주기 일쑤다. 그러면 의대 교수는? 외모로 판단해야 한다. 가운에 무슨 과라고 씌어 있으면서 연배가 좀 있어 보인다, 그러면 교수다. 물론 의대는 나이든 사람이 워낙 많아 꼭 그런 것만은 아니어서, 학생 때 같은 학년 형이 대머리였는데, 그 형이 실습을 돌 때면 환자들은 물론 인턴들도 교수님인 줄 착각을 해 인사를 하기도 했다.
레지던트가 환자를 보는 사람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지만, 인턴은 도대체 뭘 할까? 각 과를 돌면서 진료를 돕는 게 주 임무지만, 그 중에서도 채혈은 필수적인 임무다. 의대를 나오면 피를 잘 뽑는줄 알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학생 때 내가 피를 뽑아본 것은 본과 2학년 때 한번이 유일했다. 지금은 학생실습이 강화되어 좀 낫겠지만, 그때 난 사람들에게 3월초에는 병원에 입원하지 말라고 한 적도 있다 인턴이 새로 들어오는 게 2월 말이라, 채혈이 좀 서투르기 때문이다. 혈관이 좋은 사람이면 몰라도, 비만인 사람이나 여성분들-지방이 많다-은 피뽑기가 어렵다. 만성질환이 있어서 소위 '혈관이 숨어버린' 사람이라면 난이도는 더욱 증가한다.
채혈은 한번 찌를 때 제대로 찔러야지, 처음에 실패하면 대개 잘 안되기 마련이다. 내가 공보의로 있을 때 아주머니 한분이 아드님과 함께 말라리아 검사를 하러 온 적이 있다. 말라리아검사 하려면 피를 뽑아야 하는데, 우리 과에서는 그래도 의사면허가 있다고 내 등을 떠밀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도 그렇지만, 아들 몸이 장난이 아니었다. 팔을 딱 봤는데 혈관이 전혀 안보였다. 무지하게 떨렸다. 눈 딱 감고 찔렀더니, 공기만 피식 나온다. 미안하다고 하고 다른쪽 팔을 찔렀다. 근데 또 실패였다. 사람 팔이 두 개인 게 원망스러웠다. 원래 그러면 포기하는 게 원칙이지만, 그땐 내가 좀 이성을 잃었었나보다. 먼저 찌른 팔에 다시 고무줄을 감고 주사기를 넣었는데, 또 공기만 나오는 거다. 그 사람이 날 째려보는 게 심상치 않아, 잠깐 누구 좀 부르러 간다고 하고선 구석에 숨었다. 잠시 후에 어머님이 들어오셨다.. 피뽑는 거 못보겠다고 나가 계셨었는데, 아드님과 얘기를 하더니 "뭐야 세 번이나 찔렀어?"라고 하면서 그 사람 어디갔냐고 소리를 치신다. 무서워서 고개를 더더욱 푹 숙였다. 그때 걸렸으면...
그 사람의 피는 결국 다른 선생님이 오셔서 뽑았다. 근데 "비만이면 어렵다"고 해주면 좋은데, "혈관 잘보이는구만 왜 못했지?"라고 하셔서 어찌나 얄미웠는지 모른다. 그 뒤 난 피나는 연습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 내게 선뜻 팔을 내주는 사람이 없어서, 할수없이 혼자 연습을 했다. 오른손으로 내 왼팔에서 피를 빼는 연습을. 혼자 그러고 있으니까 보는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엽기적이라고 난리가 났고, 그 이후 사람들이 팔을 좀 제공해 줘서 연습을 조금 하긴 했다. 하지만 혈관이 안보이거나 하는 환자는 되도록이면 안뽑으려고 했고, 한번 실패를 하면 과감히 포기했다. 그때의 기억이 뼈저리게 남아서다.
피를 뽑을 필요가 없는 나에 비해, 인턴들은 그걸 못하면 큰일이 나기 마련, 거기다 매일 하는 게 채혈이니 한달만 지나면 가히 입신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팔 혈관이 숨어 버리면 손등에서, 혹은 허벅지에서 뽑기도 하는데, 주사기만 넣으면 피가 나오는 수준이다. 인턴들 말로는 한달만 지나면 사람을 볼 때 혈관만 보인다고 할 정도. 혈관도 거의 없는 신생아의 머리에서 피를 뽑는 걸 보고 내가 임상을 안하기 참 잘했다는 생각도 했다. 아무튼 입원을 하려면 3월 초보다는 4월이 좋다. 그런데 대개의 감기환자는 2월말에서 3월초에 발생을 하니, 이게 카프카가 말하는 부조리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