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의 것을 베끼는 걸 표절이라고 한다. 일종의 도둑질인데, 물건을 훔치는 것에 비해 지적 도둑질이 더 많은 지탄을 받는 것은 지식생산에 드는 수고를 더 높이 쳐주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되었건 표절은 나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표절의 왕국이라 할만큼 사회 각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표절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TV는 일본 걸 베끼고, 음악은 일본노래를 베낀다. 얼마 전 남의 논문을 베낀 게 들통난 교수 몇 명이 해임된 예에서 보듯, 학문의 세계에서도 표절은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에 대한 처벌은 매우 관대해 보인다. 자신의 노래가 표절이라는 게 밝혀져 은퇴를 선언한 김민종은 어느새 복귀해 못부르는 노래를 부르고 있고, 방송국에서 표절이 밝혀져 은퇴를 한 작가나 피디의 얘기는 과문한 탓인지 아직 들은 바가 없다.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킨다는 문학판에서도 그런 현상은 마찬가지다. 신경숙의 <딸기밭>은 미국서 죽은 내 초등학교 동창의 책을 표절한 것이지만, 작가는 "불찰"이라는 한마디로 구렁이 담넘듯이 넘어갔고, 문학판과 언론은 지극히 조용했다. 그후 신경숙은 변변치 않는 책을 펴내면서도 여전히 잘나가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로 시작하는 긴 제목을 가진 데뷔작에서부터 표절이 들통난 이인화는 "표절이 아니라 혼성모방"이라는 궤변을 펴며 자신을 변명했고, 지금은 잘나가는 문학권력자가 되어 있다. 김윤식 교수의 표절을 지적한 문학평론가 이명원은 그 죄(?)로 인해 박사과정에서 잘렸다. 표절에 대한 책임추궁이 없었던 것도 한국문학이 지금 위기에 처하게 된 한가지 이유가 아닐까?
지금은 깨끗한 척하지만, 나도 표절을 저지른 적이 있다. 대학에서 수업 전에 한명씩 명상을 할만한 글을 써오라고 했는데,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도저히 생각이 안나서 김동길 씨의 칼럼을 베꼈다. 기차에서 사람들이 내리는데-죽는다는 걸 의미-남은 승객들이 "잘 내렸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는데,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그 글에 대한 반응은 그런대로 괜찮아서, "야, 너 잘썼더라"라는 칭찬을 친구들로부터 들었다.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음은 물론이다. 또 한번은 써클지에 내 이름으로 된 칼럼-서민칼럼-이 신설되는 바람에 저질렀다. 도저히 생각이 안나서 역시나 김동길 칼럼을 대폭 베꼈는데, 제목이 '결혼을 해, 말아'였다. 그 글이 나가고 난 뒤 "글이 많이 늘었더라"라느니 "정말 잘썼다"는 등의 찬사가 잇따랐다. 과거를 반성하고 내 스타일대로 쓴 2호부터는 그런 칭찬이 나온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한가지 의문. 김동길의 그 칼럼집은 그런대로 많이 팔렸는데, 내가 관계한 사람들은 아무도 그걸 읽지 않았단 말인가, 아니면 알고도 넘어갔을까.
표절이 곧 죽음을 뜻하는 학문의 길에 들어선 이후, 난 내가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되었고, 그 후부터는 바르게 살고 있다. 작년 이맘때, 딴지일보에 기생충을 소재로 쓴 건강동화를 올렸는데, 누군가가 이런 답글을 달았다.
[제목: 여기분들은만화도안보시나..이거 거의 표절인데여..
일본마나의 내용과 너무 유사하군용..보신분들은 중간에 무어야 그거자너 할정도니..닥터 k죠 아마]
닥터K가 뭔지도 모르는 판에 이런 말을 들으니 무지하게 화가 났다. 더 가관인 것은 그 다음 리플이었다.
shon 아아 그랬군요.(2003/01/06(19:42))
그 다음 리플을 보고 마음이 좀 풀렸지만-"닥터k 2부까지 전부 다 읽은놈인데 전혀 몰겠군여;; 다만 딴지글이 닥터k보다 7배정도 더 잼있는건 알겠는데;;흐음..(2003/01/07(05:24))"-기분은 영 나빴다. 표절을 주장하려면 적어도 어디어디가 비슷하다는 근거 정도는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그에 대한 답을 촉구했지만, 응답은 없었다. 생각을 해봤다. 내가 보지도 않은 책을 표절할 수 있는 걸까? 아주 우연한 일이지만, 비슷한 구상을 서로 다른 사람이 할 수는 물론 있다. 하지만 그 확률은 너무 희박한 게 아닐까.
표절에 대해서는 좀더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근거도 없이 단어 몇 개 비슷한 걸 가지고 표절로 몰아붙이는 성급한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표절의혹을 제기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당사자의 명예-나야 별 명예가 없었으니 다행이지만-가 크게 실추되는 일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