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나게 출근하는데 학장님이 전화를 한다. 출근하는대로 학장실에 들러 달란다. 언제나 그렇지만, 학장이 부르면 좀 무섭다. 꼭 이렇게 말할 것 같아서다.

"본부에서 연락이 왔는데, 서선생 연구실적이 아주 부진해. 그래서...재임용 탈락을 결의했네. 내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더라구. 미안하네"

하지만 돌이켜 생각을 해보니 학장실에 가서 결과가 나빴던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위원회를 맡아 달라거나, 대학평가에 관한 일을 도와 달라는 등...심지어 잘리면 어쩌냐고 걱정을 하고 들어갔더니 예상치 못하게 조교수 임명장을 준 적도 있다. 하여간 오늘도 떨리는 맘으로 학장실에 갔다. 비서에게 물었다.
"무서운 일인가요?"
비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다.
"학장님 기분은 좋아요?"
"별로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음, 그렇군.

노크를 했더니 생화학 교수랑 얘기 중이다. 소파 옆에 이쁘게 앉았다. 얘기를 들어보니 기초 교실에 교수 자리를 늘리는 내용이다.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우리 과도 신규교수를?  그렇다면 심복을 친구에게 가게 할 수 없다, 당장 우리 학교에 오게 해야겠다, 이런 상상을 하고 있는데, 생화학 선생이 갔다. 내 차례.

"어, 서민선생, 내가 부른 이유는..."
책상에 가서 뭔가를 찾는다.
"날 좀 도와줬으면 해서... 이번에 간호학과 3학년 애들 나이팅게일 선서식(머리에 캡을 쓰는 의식)이 있는데.."
그랬다. 학장님은, 선서식에서 읽을 문안을 나에게 써달라고 한 거였다. 맨날 똑같은 거 읽으니 식상하다나?
"서선생이 글을 잘 쓰니까 부탁을 하는거야"

우쒸, 이게 뭔가.... 그래서 난 오십여분 동안 나이팅게일과 씨름을 했다. 나이팅게일이 활약한 전쟁은 크림 전쟁이고, 크림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가 연합해서 싸운 싸움이며,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나이팅게일은 크림의 참상에 분노, 전쟁에 뛰어들어 수많은 사람을 구해낸다. "그녀의 활약은 전세계 사람들의 가슴에 사랑의 꽃을 피웠다"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군.
네이버를 아무리 뒤져도, 내가 원하는 건 없었다. 다른 학교의 축사가 있으면 그걸 대충 베끼면 되는데 말이다.

우습게 쓰라면 모르겠지만, 그렇게 점잖은 자리에서 읽힐 원고를 쓰는 건 영 소질이 없다. 삼류에로소설을 쓰는 사람에게 오페라에 공연될 시를 맡길 수는 없지 않는가? 낑낑대며 완성한 내 원고는 "화창한 날씨에 선서식을 하게 된..."으로 시작을 하며, 학장님의 기대에 걸맞지 않게 영 재미가 없다. 그날 날씨라도 좋아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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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4-04-14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파에 이쁘게 앉아 기다리는 마태우스님의 모습이 떠올라서 잠시 즐겁게, 허나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하하^^ 저도 그날 날씨가 좋기를 기대하겠습니다.

비로그인 2004-04-14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학장님은 뭔가 다른 분위기의 원고를 원하셨겠지만, 자리가 자리니만큼 마태우스님 특유의 재기발랄한 글도 좀 그럴거 같구...^^ 그래도 앞에 '탈락을 결심했네!'이부분 보고 가슴이 철렁했는데, 나쁜 소식이 아니라 천만다행이에요~ 선서식날 날씨가 좋길 바랄께요. ㅎㅎ

마태우스 2004-04-14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시보님/제가 앉는 모습은 정말 이쁘답니다. 언제 보실 날이 있겠죠?
앤티크님/그래요, 그만두라는 얘기가 아니라서 저도 너무 좋습니다.

비로그인 2004-04-14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저도 축사 원고 쓰고 있는데요 ...글머리에 봄날씨 운운 하다가 혹시 당일 날씨가 꿀꿀하거나 비가 오면 오쩌나..걱정하고 있었답니다 ㅋㅋㅋ

panda78 2004-04-14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구나, 마태우스님은 참 이쁘게 앉으시는구나.. 마태우스님 이쁘게 앉아 계신거 보러 언젠가 꼭 서재 오프모임에 출석하기로 결심. ^^;;;

가을산 2004-04-14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간호사로서의 길에 들어서면서, 수관식을 하면서 ... 환자를 내몸같이,,, 선배들이 닦은 길을 본받아.,.. ..... 이러이러이러 하겠습니다.'
하고 결의를 다지는 행사이지요. 학생 때 간호학과 동기들의 수관식을 보았는데, 상당히 아름다운 의식이었던 것으로기억합니다. 촛불도 키고, 선배나 교수들이 간호사 캡을 씌워주고, 위와 같은 선서를 낭독하고... 눈물을 흘리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책읽는나무 2004-04-14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저도 처음 글을 보고...정말 올것이 오고야 만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님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신것에 저또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ㅠ.ㅠ

sooninara 2004-04-14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아들 국어 학습지에 나이팅게일에 대한 지문이 나오는데..울아들..'엄마 크림 전쟁이래요..나도 먹고 싶다..'했다는 전설이 있습죠...

비로그인 2004-04-14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에서도 인기가 짱이시군요??

연우주 2004-04-15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이쁘기만 해봐요~~~! ^^

ceylontea 2004-04-16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임용 탈락 결의 -> 가슴 철렁
소파 옆에 이쁘게 앉았다 -> 미소
선서식에서 읽을 문안 -> 헉 -0-

가을산님 글의 "아름다운 의식"... 상당히 부담스러우시겠어요.. 마태우스님...
소파에도 이쁘게 앉는 분이니.. 아름다운 의식에 어울리는 글 멋지게 써보시어요..
잘 해내실 겁니다..
그리고... 수니나라님... 크림전쟁 나도 먹고싶어요... 넘 재미있어요..

진/우맘 2004-04-15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마태님이 서재에 쓰는 것 같은 재기발랄한 글을 학장님이 너끈히 소화해 낼 수만 있다면....학장님은 그 날로 스타가 되었을텐데^^

비로그인 2004-04-15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장님을 은근히 견제하시는게 아닌가 하는....ㅋㅋㅋ

마태우스 2004-04-15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그러게요... 저도 웃기게 쓰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 했답니다.
실론티님/매우 평이하고 재미없는 글이 나왔더군요. 역시 사람은 자기 길이 있다니까요.
연보라빛우주님/이쁘면 어쩔건디??? <--슬며시 반말로...
폭스바겐님/인기 없습니다. 밥도 혼자먹고, 왕땁니다....

마태우스 2004-04-15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전 한번도 나이팅게일 선서식을 본 적이 없어서...의식이 이쁜지는 모르겠고, 간호학과에 이쁜 애들이 몇 있다는 것은 ....하핫. 제가 원래 이런 놈입니다..
sweetmagic님/견제?? 저 학장님 좋아하는디요?
panda78님/이쁘게 앉아야 사랑받습니다!!
책읽는나무님/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연우주 2004-04-15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쁘면... 이뻐해드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