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역에서 기차를 타니, 내 옆자리 아주머니가 뒤에 앉은 할아버지와 얘기 중이다. 소리가 좀 컸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열심히 책으 읽는 수밖에. 그런데 나보다 네줄 앞에 있던 아저씨(할아버지?)가 도저히 못참겠는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아주머니, 제발 조용히 좀 하세요. 내가 용산역에서 탔는데, 지금까지 계속 떠들고 있잖아요?"
그 아저씨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게 컸지만, 그냥 지고 말 아주머니가 아니다.
"아니 기차에서 말도 못해요?"
급기야 둘 사이에 설전이 벌여졌다. 첨엔 그 아저씨를 응원했는데, 사태가 그렇게 흘러가니 황당했다. 둘은 무려 5분이나 그렇게 싸웠는데, 아주머니의 말씀이 히트였다. 몇 개만 적어본다.
"내가 택시 타면 천원이라도 더 주는 사람이야!" <--그게...무슨 상관일까.
"내가 지금까지 누구랑 한번도 싸워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지금 싸우는 건 그렇다면 첫 싸움?
"내가 시어머니한테도 한소리 들은 적이 없당께!" <--그런 시어머니도 있나? 혹시...시어머니가 안계신 건 아닌지...

아저씨가 물러가자 아주머니가 날 붙잡는다.
아줌: 학생(히히, 학생이래) 내가 그렇게 떠들었소?
나: 아, 아니요 (사실은 귀가 멍멍했어요)
아줌: 근데 저 잡것이 왜 와서 지x이지? 내가 우연히 고향사람을 여기서 만났지 않겠소? 반가워서 몇마디 했는데 그걸 가지고...
나: 아, 네... 너무했네요 (아줌마가요!)
아줌: 내가 학생만한 아들이 있어. 어디서 행패야?
나: 그, 그러게요 (책 좀 읽자구요T.T).
아줌: 학생, 어디까지 가유?
나: 천안이요.
아줌: 난 장성까지 간다유. 우리 아들이 거기 있거든.
나: 아, 네.
아줌: (떠드는 다른 사람을 가리키며) 왜 저사람 떠드는 건 가만 놔둔데?
나: 그, 그러게요.

내가 시큰둥하게 반응해서 그런지, 아주머니는 창밖을 내다보며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진달래가 이쁘게 피었구만"
"내가 누구한테 한소리 들은 적이 없는 사람인데 저것이..."
나이든 사람들은 누구나 쉽게 친구가 되며, 이야기를 나눈다. 나도 살아온 사연이 많은데, 그분들은 오죽하겠는가? 가슴 속에 묻어둔 이야기가 너무 많다보니, 처음 보는 사람에게라도 마구 쏟아붓고 싶어지는가보다. 원래는 출근 시간 내에 손에 든 책을 다 읽으려고 했지만, 포기하기로 했다. 딱 50분만 아주머니의 한풀이를 도와 드리자. 난 아주머니에게 말을 건넸다.
"아드님이...장성에 사세요?"
그 질문과 동시에 아주머니는 쉴새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며느리 욕--> 아들 자랑 -->다시 며느리 뒷다마--> 딸 자랑
내게 그리 도움되는 얘기는 아니었지만 난 허벅지를 꼬집어 졸음을 쫓아가며 열심히 들어드렸는데, 내가 내릴 때 아주머니는 고맙다고 하셨다.

* 참고로 그 아주머니는 매우 객관적인 시각을 가진 것 같았다. 날보고 "서른 안됐지?"라고 하기에 웃으면서 넘는다고 했더니, "내가 보기엔 서른 하나나 둘밖에 안되어 보여"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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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4-13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 마지막 *에 적힌 말때문에, 아줌마에 대한 신뢰가 와르르르...^^ 아줌마랑 대화하는 마태우스님 속내도 너무 웃겨요. ㅋㅋ 화내신 할아버지 심정도 이해가지만, 또 그 아줌마의 기분도 이해는 되네요. ^^

책읽는나무 2004-04-13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한구사람들은 목소리가 좀 큰것일까요??....내가 말하는것은 큰줄 모르고...또 남의 소리는 크게 들리고....^^....그런데...아저씨들도 만만치 않지만...아줌마들은 목소리가 좀 크긴 크더군요..애들 키우다보면 다들 목소리가 커지나봅니다...ㅎㅎㅎ...그러면서 시야도 흐려지나봅니다.....님을 서른한두살로 본것을 뵈니~~~^^

다이죠-브 2004-04-13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은 젊어 보인다는 말 하고 싶어서 쓰신거죠?

2004-04-13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우맘 2004-04-13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토끼똥님...혹시 폭스님이 X-파일 명의로 닉네임을 하나 더 만든 것 아닐까요?
<아줌마>가 말이 많을 수 밖에 없는데는, 다 이유가 있답니다. 그냥 <여자>에서 <아줌마>, 즉, 한 남자의 아내, 며느리, 어머니이자 시어머니...그런, 복합적인 역할을 하게 되면 할 말이 그득그득 쌓이는데, 사실 <아줌마>들은 그런 얘기를 풀어낼 상대와 시간을 마련하기 힘들거든요. 마태우스님, 정말 좋은 일 하신겁니다. 덕분에 <30대 초반>이라는 쾌거도 얻으시고.^^

마태우스 2004-04-13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티크님/그래도 그 말이 아주머니가 한 말씀 중 가장 신빙성 있는 말이었답니다.
책읽는나무님/시야가 흐리다니요. 질투나서 그러시는 거죠???
토끼똥/제 글의 의도를 간파하다니, 역시 오랜 친구답소. 글구 진우맘님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코멘트가 촌철살인이다! 왜냐면 폭스바겐님이 워낙 촌철살인의 멘트를 많이 날리셔서...
진우맘님/아줌마가 그래서 말이 많다면, 저는 왜 말이 많은 건가요? 제가 생각해도 너무 시끄러워요.

플라시보 2004-04-13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듣건 말건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끊임없이 큰 소리로 떠드는 부류의 사람들. 참 난감하죠. 흐흐. 그래도 마태우스님은 착하시네요. 길게 들어주신것 같은데^^

연우주 2004-04-13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번엔 토끼똥님과 같은 의견이었어요...^^;

마냐 2004-04-13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부처님의 선행 이야기 듣는 거 같았어요. ^^;;; 정말 아무나 못할 일. 베푼대로 복이 돌아온다는데....

비로그인 2004-04-13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른 안됐지?(거참 괜찮은 아저씨일쎄...세상에 꽁짜가 어딨냐!!^^)"
"아뇨 서른 넘습니다(히히!! 아까는 학생이래놓고!^^:: 그래도 서른이 어디여!!)"
"내가 보기엔 서른 하나나 둘밖에 안되어 보여(짜식~ 그래도 양심은 있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