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2일 (일)
누구와?: 여친과
주량: 세병을 나눠먹었는데, 내가 두병은 마셨겠지?

한강 고수부지를 갔다. 맨날 음침하게 극장과 술집만 갔던 게 미안해서 야외로 나가자고 한 거였는데, 굉장히 좋아했다. 강을 보면서 '김가네'에서 사온 김밥과 김치볶음밥을 먹으니 제법 소풍온 기분이 났다.

인상적인 것은 개들이 굉장히 많다는 거였다. 형형색색의 개들이 귀여움을 마음껏 발산하며 뛰놀고 있다. 잘생긴 시베리안 허스키도 보이고, 쉬츠, 마르티스, 퍼그 등도 보인다. 개들이 많아진다는 게 우리 사회가 점점 비인간화된다는 증거인지도 모르지만, 어찌되었건 개들을 보고 있으면 나까지 즐겁다.

난 개에게 목줄을 매지 않고 살았다. 개의 목에 걸린 줄은 개를 노예로 만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디론가 가려는 개를 목줄을 당겨서 막는 주인, 이런 걸 보는 건 마음 아프다. 목줄을 맨 개는 가려는 곳에 못가니 성질만 나빠지고, 자율성을 상실하게 되지 않겠는가? 우리 벤지가 성격이 좋고, 자율적인 개로 자라난 건 나의 훌륭한 교육방침 때문이었다는 게 내 주장이다. 난 벤지가 가고 싶은 곳에 가게 해 줬지만, 그 자율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벤지가 언젠가 비둘기를 잡는다고 차도로 뛰어들었을 때, 난 마구 야단을 쳤고, 벤지는 깊이 반성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 후 벤지는 차도에 비둘기 할아버지가 있다해도 거들떠 보지 않는다. 이런 게 바로 교육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개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 때문에 목줄을 안맨 개는 공원에 출입할 수 없게 되어, 벤지는 잘가던 여의도 공원도 못가게 되버렸다. 개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조폭들도 공원 출입을 못해야 하지 않는가? 시베리아 허스키같이 위협적인 개라면 모르겠지만, 조그만 애완견들에게도 목줄을 매게 하는 건 좀 너무한 것 같다.

이리뛰고 저리뛰면서 재롱을 떠는 개들을 보니, 문득 벤지가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벤지의 나이 이제 16세, 사람으로 따지면 80살이니, 150살이니 하는 주장이 난무한다. 물론 난 생물학적 연령보다 어떻게 키우냐가 중요하다고 우기지만, 벤지는 예전의 젊고 이쁜 벤지는 아니다.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내 옆 의자에 껑충 올라가 내가 주는 반찬을 먹곤 했지만, 2년 전부터 점프력이 눈에 띄게 둔화, 지금은 의자 밑에서 뭘 먹는다 (무리하게 올라가려다 떨어진 적도 있다). 눈에는 백내장이 왔고, "벤츠"와 "벤지"를 구별했던 귀도 이제 잘 안들리는 듯, 아무리 불러도 알아듣지 못한다. 내가 와도 모르는 채 소파에서 잠을 자는 벤지, 개나 사람이나 늙는다는 건 슬픈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피부에 뭔가가 나기 시작했다. 지방종이라는데, 약을 발라도 낫지 않고 딱지가 크게 졌다. 털이 길 때는 잘 안보이지만, 털을 깎고 나니 훤하게 보인다. 가만 놔둘 일이지, 자꾸만 그 딱지를 떼어내다보니 상처가 점점 커진다. 언젠가 어린애가 벤지를 만지려는데, 그애 어머니가 말린다. "만지지 마. 피부병 있잖아" 그 말을 들을 때 가슴 미어졌다.

등산이라도 가자면 좋아서 껑충껑충 뛰었던 벤지, 하지만 지금은 어딜 가는 것조차 귀찮아 보인다. 날 보면 여전히 꼬리를 흔들고, 잠시라도 안보이면 날 찾아 이방 저방을 뒤지지만, 벤지는 늙었다. 이제 나도 벤지와의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 갑자기 슬퍼진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연우주 2004-04-12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슬프겠군요. 벤지가 오래 오래 살았음 좋겠네요.

비로그인 2004-04-12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두요... 제게 남아 있을지 모르는 시간... 벤지에게 선물할께요 ~ 얼마나 필요하세요 ? 음 그래도 10년 이상은 무립니다 ^^;;

가을산 2004-04-12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벤지와의 추억을 많이 만들어 놓으셔야 겠네요.
우리 쥴리가 늙으면 저도 슬퍼질거에요.... ㅜㅡ

비로그인 2004-04-12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슬퍼요...잠시 키우던 병아리가 죽었을때도 그렇게 슬펐는데, 수년간 정든 벤지랑 헤어지면 얼마나 슬플까요. ㅠㅜ

플라시보 2004-04-12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지가 오래오래 님의 옆에서 님이 주는 밥을 먹으며 잘 지내길 바랍니다.

갈대 2004-04-12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체나이로는 마태우스님의 갑절을 산 셈이군요. 벤지가 오래산 개로 기네스북에 오를 그날까지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panda78 2004-04-12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지가 오랫동안 건강하기를.. 벤지야, 힘내라..

마태우스 2004-04-12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렇게 많은 분들이 벤지의 건강을 빌어 주시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술 조금 줄이고, 벤지와 많은 추억을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진/우맘 2004-04-12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지는 사랑받는만큼 오래 살겁니다. 그리고, 아마 이별해서도 행복할 거예요.
조만간 서재에 오를 <강아지 하늘나라>라는 그림책을 기대하십시오....정말 결고운 상상력의 소산으로, 강아지들은 하늘나라에 갈 때 날개를 달지 않는답니다. 대신 그 앞에 드넓은 풀밭이 펼쳐진대요. 강아지들이 달리는 것을 너무나 좋아한다는걸, 하느님이 아시기 때문이죠. <진이의 사진독서록>예정작이었는데, 마태님과 벤지를 위해 서둘러야겠네요.

다연엉가 2004-04-12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의 글을 이렇게 가슴 아프게 읽다니....
걱정마세요.. 괜히 제가 누운물(?)이 나올려고 합니다...
벤지는 너무 너무 행복하네요

*^^*에너 2004-04-12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슬프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이별은 정말 슬프다. ㅡ.ㅜ

2004-04-12 18: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4-04-13 0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기르는 토토땜에 눈물를 한두번 뺀게 아닌데...어떤이가 회사에 나오지 않는 이유가 강아지가 죽어 어머니가 쇼크로 쓰러져서 그랬다고 했을때 남들은 다 키득키득 웃더이다. 전 울 토토가 없는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데 말이죠. 벤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네요

마태우스 2004-04-13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흑, 폭스님...엉엉. 토토도 건강하게 자랐으면 좋겠네요.
책울타리님/감사합니다. *^^*에너님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