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동창회를 했다. 압구정동에 있는, 오킴스라는 비싼 곳에서 모였는데, 삼겹살에 소주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런 화려한 곳에서 만나는 게 그다지 마땅치 않았지만, 생각해보니 서른명이 넘는 인원이 오붓하게 모일 곳이 거기밖에 없고, 6시에 만나서 밤 12시가 넘도록 놀았으니, 본전은 충분히 뺀 듯하다. 분위기도 좋고, 오킴스가 만든 맥주의 맛도 뛰어나, 앞으로는 오킴스 예찬론자가 될 것 같다.
난 우리학번을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한다. 학생 때부터 일년에 몇차례 씩 MT를 갔고, 수업을 제껴가며 2박3일간 설악산 여행도 갈 정도로 단합이 잘되는 학년이었는데, 졸업 후에도 온라인, 오프라인 모두에서 잘 나가고 있다. 대부분의 온라인 카페들이 글 기근으로 하나씩 쓰러져가는 이때, 하루에 열 개 이상의 새글이 반짝반짝 빛나는 곳은 우리밖에 없다. 학생 때는 그다지 맘에 안든 애도 있었지만, 지금은 동창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친구들이 다 소중하고 반갑다. 그들을 만나니 모여서 그랜다이져-초록빛 자연과 푸른하늘과 하나뿐인 인간에게 지구를 위해서!-를 부르던 그 시절 생각이 난다.
엊그제 모임은 폐암으로 투병중인 친구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 4년 전인가 폐암이 발견되었고, 가슴을 열었다가 암이 너무 퍼져 그냥 닫아야 했던 그 친구는 6개월밖에 못산다는 의학적 선고를 이겨내고 3년 반째 투병 중이다. 방사선 치료도 하고, 화학요법도 쓰는 등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는 동창회에 나와 줬고, "술 좀 적당히 먹어라"라는, 만날 때마다 하는 조언을 내게 했다. 언젠가 "이번 추석이 제 마지막 명절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더더욱 소중하게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라는 글로 우리를 울렸던 그 친구가 부디 회복되기를 빌어본다.
동창회는 나이트의 부킹과 비슷한 면이 있다. 얘기를 좀 하다가 재미가 없다 싶으면 "나 쟤랑 얘기좀 할게" 혹은 "화장실에 좀..."이러면서 저쪽으로 휭 하고 간다. 거기서도 재미가 없으면 또다른 곳으로 가고... 주 관심사가 공부였던 학생 때는 나와 얘기하고픈 얘가 거의 없었지만, 졸업을 하니 상황이 달라져, 내 옆자리가 비면 잽싸게 사람들이 앉는다. 심지어 소변을 참아가며 내 옆자리를 지키는 사람도 있다는 자백을 받아내기도 했다. 인기가 많다는 건 어찌되었건 즐거운 일, 이게 다 오랜 기간 연습한 유머감각 덕이 아니겠는가? 이런 내가 나이트에서는 왜 인기가 없는 걸까? 내 좋은 점 중 하나는 누군가가 심심하게 있는 걸 못본다는 것. 내 맞은편에 앉은 얘는 공부밖에 몰랐고, 지금도 유명외국잡지에 많은 논문을 싣는 애였는데, 보니까 왕따다. 그래서 걔에게 몇마디 말을 걸었다.
-너 별명이 '외국잡지'라며?
=편수만 많지 뭐. 참, 이번에 JBC-아주 좋은 잡지다-에 논문 하나 실었어.
-그, 그래? 비결이 뭐니?
=열심히 하는거지 뭐.
그와 얘기하다가 상처만 받았다....
동창회 전에, 내 동창 중 몇 명에게 내 책을 보내줬었다. 그 중에는 탤런트와 결혼한 성형외과 의사도 있었는데, 말 싸인을 그리고 나서 이렇게 썼었다. "쌍거플 공짜로 해줄 거지?"
그랬더니 엊그제 만났을 때 그가 진지하게 날 설득한다. 내가 쌍거플을 하면 드라마틱하게 이뻐질 수 있으며, 병원 홍보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서 말이다. 내가 쌍거플 운운한 건 순전 농담이었지만, 십여분간 집요한 설득을 받고나니 마음이 흔들렸다. 하마터면 "그래, 스케줄 잡자!"고 얘기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