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두 인격체간의 만남이건만, 그걸 소유로 아는 사람들이 있다. 애인이 변심을 했다고 집에 불을 지르는 사람도 그렇고, 노라가 집을 나간 이유도 자신을 인형 취급하는 남편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까 몇시에 전화를 했는데 왜 안받았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그런 기질이 있는 거라는 게 내 생각인데, 엊그제 읽은 책에도 그런 사람이 나온다.
-결혼 후 4년 동안, 난 매시간 그녀를 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네...
-그녀는...단 한번도 다른 남자나 여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지. 왜냐하면...내가 질투를 했을 테니까.
-그녀가 길거리에서 어린아이를 쓰다듬어도 그 애정이 원래 내것이라는 생각에 질투가 날 정도였지. 그녀는 날 이해해주었고 괜찮다고 했어. 사랑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질투하기 마련이라고.
-난 그녀에게 모든 걸 주고 싶었어.
그녀는 결국 그런 생활을 참지 못하고 도망을 가버린다. 그런 강박적인 사람과 산다는 게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한가지 의문은 결혼 전에 그런 걸 몰랐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전조는 있었으리라. 만날 때마다 선물을 한가지씩 준다든지 하는 식으로, 자기만의 의식을 강박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은 그런 기미가 조금은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그런 낌새가 발견되면, 혹시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미련없이 그만두는 게 몸에 좋다.
내 주변에 그런 남편은 없는 것 같다. 사람이란 한 분야에만 강박적일 수는 없는 노릇이고, 강박적인 사람은 나같이 헐렁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내 고교 동창으로 수업이 시작하기 전마다 손을 씻고, 휴지로 책상을 엄청나게 닦던 신모씨만 해도 나의 무계획적인 생활을 얼마나 싫어했던가. 그러고 보니, 주변에 그런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몸담았던 모 단체와 관계된 일인데, 그 단체에서 나보다 두 살 많은 누나가 있었다. 맨날 밤늦게까지 놀고, "오늘 망가지자!"를 부르짖을 정도로 술도 잘 마셨다. 난 그 누나를 매우 좋아해-물론 팬으로-학교로 편지도 자주 쓰고, 생일 때마다 선물을 배달하고 그랬는데, 내가 워낙 누나들을 좋아했고, 그 누나에게만 그러는 것도 아니라, 그 단체에서 우리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졸업 후 자연스럽게 소식이 뜸해졌는데, 그 누나의 동생의 친구로부터 그 누나가 결혼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난 당연히 결혼식에 참석을 했는데, 그때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어느날 밤, 그 누나의 어머니-물론 나랑 잘 안다-를 통해 안 전화로 통화를 한 적이 있는데, 뭐 잘 지내냐, 결혼 하니까 어떠냐, 넌 사귀는 사람이 있느냐, 등등의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며칠 후, 직장으로 전화가 왔다. 그 누나의 남편이라기에 그러냐고 인사를 했더니, 대뜸 이런다.
"그때 결혼식에 오셨었죠? 어떻게 알고 왔어요?"
그다음 질문이 얼마 전에 자기 부인한테 전화하지 않았느냐, 그때 무슨 얘기를 했느냐 하는 거였고, 그다음으로 모 단체에 있을 때 둘이 어떤 관계였냐는 거였다. 그제서야 이 남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 나는 "전혀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선후배 사이를 그런 식으로 얘기하시니 불쾌하다"고 했다. 그 남자, 마구 화를 낸다. "남의 마누라한테 전화를 해가지고 가정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어 놓은 사람이 그따위 소리를 하는 게 말이 되냐"며 "불쾌해야 할 사람은 나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이 오해할 소지가 분명 있었다. 그렇다 해도, 그가 보인 반응은 상식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었다는 건 확실하다. 어찌되었건 미안하다고 한 뒤 전화를 끊고 나자, 나 때문에 누나 집에서 봉변이라도 당하지 않았는가 걱정이 되었다. 그 집으로 전화를 했더니 마침 누나 아버님이 받으신다 (어머니였으면 좋았을 텐데...). 아버님은 내 이름을 듣더니 이렇게 소리를 치셨다.
"이 개놈의 새끼야! 왜 남의 집에 전화하고 지x이야!"
나중에, 그 누나에게서도 전화가 걸려왔다. 미안하다고, 전화 하지 말라고. 그때 난 매우 시니컬하게 전화를 받았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역시 좋은 사람이랑 결혼을 해야 함에도, 왜 그런 사람과 결혼했느냐는 힐난이었을거다. 물론 그 뒤에 누나와 통화한 적도, 만난 적도 없지만, 자유롭고 멋진 삶을 살던 그 누나가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는 짐작이 간다. 철이 든 지금은 그때 내가 미안했다고 말할 수 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