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은 멋쟁이셨다. 양복엔 늘 주름 하나 없고, 구두는 반짝거렸다. 허리 통증으로 병원에 입원하시는 날, 허리를 굽혀 구두를 닦으시는 모습은 그 대표적인 예였다. 그런 아버님이셨기에, 현관에 신발이 어지럽게 놓여 있다든지, 창틀에 먼지가 쌓여 있던지 하면 꼭 화를 내시곤 했다.

나는 멋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옷은 늘 구겨져 있으며, 대개는 전날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을 입고 출근을 한다. 심지어 술에 취해 옷을 입고 잔 그대로 밖에 나가기도 하니, 아버님께서 날더러 "넌 누굴 닮아 그러냐?"라고 탄식하시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난 머리를 빗어본 적이 거의 없다. 요즘은 아침에 샤워를 해서 그렇지, 밤에 샤워를 한 다음날이면 전위예술을 하는 사람처럼 곤두선 머리를 한 채로 외출을 했다. 어떤 날은 아톰 모양이고, 어떤 날은 사자 갈기와 같았는데, 우리 조교들은 날더러 "이러이러한 모양도 만들어 주세요!'라는 황당한 주문을 하기도 했다.

머리에 무스를 바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처음 바를 때가 스물다섯살 때인데, 그때 사귀던 여자애가 하두 졸라대서 무스를 발랐다. 그때 느낌을 '순결을 잃은 기분'이라고 표현할 정도니, 그 후에 무스를 발랐을 리가 없지 않는가? 내 머리는 자연 그대로의 원시림이고,  그런 사람이니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도 티가 안난다. 사람들은 이따금씩 내 옷의 상표를 확인하고는 "아니 이게 그, 그 유명한....."이라며 놀라곤 했다. "그 바지 며칠째 입는 거냐" "머리 좀 깎아라" "면도도 안하냐" 이게 내가 흔히 듣는 말이지만, 꿋꿋이 버티면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도대체 난 왜 이러는 걸까? 가장 큰 이유는 꾸미고 어쩌고 하는 게 귀찮다는 것. 가장 싫어하는 게 이불개는 것이고, 방안청소는 두 번째로 싫어하는 내가 머리를 빗고 어쩌고 하는 걸 좋아할 턱이 있는가. 두 번째 이유라면 꾸며봤자 별 소용이 없을 거라는 자포자기 쯤 되겠고, 세 번째 이유는 내가 맘먹고 옷을 입으면 다른 사람들이 위화감을 느낄까봐, 하는 생각에서다. 마지막 이유는 이미 고착화된 내 이미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어느 분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이다.
[서민님은...정말 특별하신 분이에요. 전 '존경'같은 말을 사람한텐 사용하지 않지만, 서민님에게는 그 단어를 쓰고 싶다는 충동이 자꾸 이네요.....그처럼 수수...하실 수 있다는 건, 거의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보라. 내가 수수한 것을 '존경'까지 하고 싶다지 않는가. 이렇게 내 스타일을 좋아해 주는 팬들의 존재는 나로 하여금 멋내는 것을 꺼리게 만든다. 길다란 머리가 자꾸 내 눈을 찔러 짜증이 나고, 어머니까지 나서서 "머리 좀 잘라라. 어디 쓰겄냐"라고 말씀하시는 이 순간에도 내가 이발소를 가지 않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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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여행자 2004-03-23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 청소를 하기보단 마음 청소를 합시다~
저두 방 청소가 싫어요^^;

플라시보 2004-03-23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흐.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특히 옷 상표를 보고 '아니 이게 그 유명한..'은 깊이 공감하는 바입니다. 저 역시 좀 주고 사 입었는데도 사람들이 전혀 몰라주곤 하더군요. 아마 몸매의 허접스러움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뭘 입혀놔도 어찌나 없어 보이는지...) 저는 꾸미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는데 단지 귀찮아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꾸밀 시간이 없습니다. 아침잠 많은 제가 10시까지 출근하면서 머리 감고 가는 것 만으로도 장해 죽겠는데 화장하고 옷 고를 시간이 어딨겠습니까? 그냥 집히는대로 입고 기초화장품이라도 다 발라주는게 어디냐 하고 생각합니다. 가끔 예쁘고 말끔하게 꾸며서 출근하는 여자들을 보면 저와는 다른 별에서 온 사람 (어쩌면 외계인일지도) 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휴~ 그들은 대체 얼마나 부지런한 것일까요? 감히 상상조차 가질 않습니다.

진/우맘 2004-03-23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템의 부족, 노력의 부족...
오늘 아침, 내가 기획(?)한 복장은 이게 아니었습니다. 치마에 깔끔한 청자켓이 오늘의 컨셉이야~하며 일어났지요. 그런데 입으려고 보니 마땅히 받쳐 입을 티가 없더군요. 그래서 아무거나 주워입었습니다. 입고보니 스타킹 신기가 귀찮더라구요. 청바지를 꿰어 입었죠. 막판에 보니 이 복장엔 도저히 청자켓이 안 어울려서, 동네 만화방 갈 때 입는 잠바떼기를 걸쳐 입고 나섰습니다.
기획) 치마에 청자켓
결과) 청바지에 티쪼가리, 잠바떼기. -.-
아이템 부족과 게으름의 결과였습니다. 이상. -.-;;

갈대 2004-03-23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스... 순결을 잃은 기분... 뒤집어집니다..ㅋㅋ

*^^*에너 2004-03-23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_______________^ ㅎㅎ
이 글을 읽고 나니 마태우스님이 무속인으로 느껴집니다.

마냐 2004-03-23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처럼 수수...하실 수 있다는 건...."...감동이군요. ㅋㅋ 10년 넘게 드라이 않고, 뭐 안바르고, 일주일에 절반은 머리 안 빗고 출근하는 저도 명함을 내밀지 못하겠슴다...오늘 아침에도, 앗, 하면서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손가락 빗으로 머리를 빗었죠. -.-;;;; 의상이야, 옷장 옷 절반 이상이 맞지 않아서리...슬프게도 그저 그렇게 쭈글쭈글하게 삽니다.....하지만 누구도 제게 "그처럼 수수하실수.."같은 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냥 "너, 어쩌다 이렇게 됐냐", "옛날에는 참 멋있었지.."라고들 하죠. ㅎㅎ

비로그인 2004-03-23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면서 여자가 옆에 앉길 바란단 말입니까???

가을산 2004-03-23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냐님 정도 레벨인 것 같습니다. 여동생은 제가 옷입는 걸 보면 갑갑해 죽으려고 합니다.
왜냐면 가을-겨울-봄 내내 입는게, 코트는 바뀌어도 안에는 9800원짜리 폴라티 일색이니까요.
흰색 폴라티 2개, 베이지색 폴라티 2개, 회색 폴라티 2개, 바지는 2년째 늘 입는 검정빛 청바지 2개. -- 이 위에 가운 뒤집어쓰면 아무도 몰라요...(라고 혼자 착각하는지도.. --;; )
여름에는 반팔 티셔츠 아니면 겨울에 입던 폴라티 팔을 잘라서 반팔로 만든걸 입습니다.
이러다보니 어쩌다 폴라티 아닌 걸 입으려고 하면 도대체 무얼 입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화장? 그건 이젠 너무도 어려운 기술일 뿐더러, 저녁에 화장 닦아내는게 귀찮고, 이젠 장비(화장품)가 없어서도 못합니다.
으아.. 이 글을 읽으면 무슨 상상들을 하실지... ㅜㅡ

sooninara 2004-03-23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스바겐님께..한표...그러면서 옆에 앉은 여자가 다른자리를 찾느라 두리번 거린다고 슬퍼하십니까??
우리남편 ..처음 저와 같은 회사에서 만날때는 군대제대하고 더벅머리 총각이었습니다..
정말 촌시러웠죠..그러다 일년후에 사내 연애란걸 시작하면서 제가 한마디했죠..
"무스를 발라보시죠" 그래서 지금까지 무스..젤을 애용하는데...혼자 착각합니다..
"회사에서 나보고 총각같데...누구하고 동기라니까 안믿어"하면서요..남편이 조금 마르고 날렵해보이니 어려보이나봐요..그리고 입사 동기아저씨는 머리가 이사가서 10살은 더 많아보이는 분이니..^^ 전 우리남편 머리에 안바르고 출근하는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마태우스님도 머리에 젤이나 왁스라도 발라주시죠..옆자리에 아가씨가 앉을것입니다..

ceylontea 2004-03-23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옷장에 절반이상이 작아져서 못입는 옷입니다.
살빼면 옷사리라 결심을 했었는데..이젠 이 살들이 다 제 살처럼 애뜻해졌습니다..
그래서 옷을 살까 했는데, 너무나 예쁜 옷들은 보았지만.. 하나 사면 맞춰 입을 옷이 없어 줄줄이 다 사야기에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왠 옷들이 그리 비싼지... ㅠ.ㅜ

sooninara 2004-03-23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정말 대단하십니다..유명한 폴라티 보고 싶습니다^^
실론티님..저하고 같네요..살쪄서 못사고..살안빠져서 못사고..이젠 옷값이 부담스러워서 못사고..

연우주 2004-03-23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스 남의 페이퍼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요즘 촌철살인이다..ㅋㅋㅋ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