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슛! 골인입니다. 나달선수, 오늘 해트트릭을 기록하네요.”

레알 마드리드의 간판 골잡이 라파엘 나달은 사라고사와의 프리메라리가 31라운드 경기에서 3골을 몰아넣으며 팀의 5-1 승리를 이끌었다. 올 시즌 들어 벌써 세 번째 해트트릭인데다 정규리그 27골로 현재 부동의 득점 1위다. 감독과 동료들의 축하세례를 받으며 경기장을 나서면서 나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지? 이 허무함은?’

거의 매 경기 골을 뽑아내고, 팬들과 언론에 의해 ‘금세기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찬사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나달은 왠지 공허한 느낌을 지울 길이 없었다. 게다가 밤마다 악몽을 꾸는데, 꿈의 내용은 늘 똑같았다. 머리가 곱실거리는 한 남자가 나타나 자신을 뭔가로 두들겨 팼다. 꿈이라고 치부하기엔 통증이 너무도 생생했다.

‘왜 자꾸 이러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만한 이유가 없었다. 자신의 성적도 성적이지만 팀도 프리메라리가 6연패를 앞두고 있었다. 한때 라이벌이었던 FC 바르셀로나는 더 이상 자신들을 위협하지 못했다. 레이카르트, 과르디올라, 라모스 등 수많은 감독을 경질해도, 아무리 좋은 선수를 영입해도 바르셀로나는 늘 2위였다. 메시와 호날두, 호나우지뇨와 카카, 레알에서 이적한 라울 등 초호화군단을 구축한 올 시즌에도 바르셀로나는 승점 12점차로 멀찌감치 처져 있었다. 베른트 슈스터 레알 감독은 “바르셀로나는 더 이상 라이벌이 아니다”리며 큰 소리를 쳤다.


그날밤 자리에 누운 채 TV를 보던 나달은 테니스 경기에 채널을 고정했다. 마침 프랑스오픈 결승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로저 페더러와 로빈 소덜링이 맞서 싸우는 중이었다. 결승전답지 않게 경기 내용은 일방적이었다. 페더러는 자로 잰 듯한 스트로크로 소덜링을 유린했고, 소덜링은 이렇다 할 공격도 펼쳐보지 못한 채 3-0으로 지고 말았다.

“페더러라, 저 친구 잘 치는군. 음, 정말 잘해.”

페더러라는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막상 경기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언론에 의하면 페더러는 테니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2003년 윔블던에서 처음 우승한 이래 2004년 4대 메이저대회를 모두 우승하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고, 2005년 호주오픈에선 마라트 사핀에게 준결승에서 져 3관왕에 그쳤지만, 2006년부터 2010년 호주오픈까지 17개 대회를 연속으로 우승하는 신기원을 이룩했다. 올 프랑스오픈까지 우승했으니 연속우승 기록은 18회로 연장됐고, 통산 우승 횟수는 26회로 2위인 샘프라스보다 무려 열두번이 더 많았다.


“테니스를 안치길 잘한 거 같아. 내가 저 친구를 어떻게 이기겠어?”

나달은 페더러의 무시무시한 스트로크를 떠올리며 도리질을 했다. 나달도 사실은 테니스 선수가 될 뻔했다. 나달의 삼촌이자 전직 테니스 선수였던 토니 나달은 나달이 세 살이 되던 해부터 테니스를 가르쳐 주었고, 늘 그에게 “넌 세계 최고의 테니스 선수가 될거야”라고 격려했다. 토니의 기대대로 나달은 8살 때 12세 이하 테니스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지만, 나달의 마음은 언제나 축구였다. 그건 아마도 바르셀로나의 간판스타이자 스페인 국가대표로 활약한 또다른 삼촌 미구엘 안젤 나달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지만, 뛰는 걸 좋아한 나달의 성향 때문이기도 했다. 샘프라스가 윔블던을 제패하는 모습을 보던 나달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테니스는 재미가 없어. 가만히 서서 라켓만 휘두르잖아.”

스페인과 유럽 테니스 대회에서 우승을 휩쓸던 12세 때, 나달은 결국 축구를 선택했다. 토니 나달은 “테니스에서도 빠른 발은 좋은 무기가 된다”고 만류했지만, 나달의 결심을 꺾지는 못했다. 토니 나달은 그 이후 미구엘 안젤 나달과 말을 섞지 않고 있다.


축구를 택한 뒤에도 나달은 승승장구했다. 인간의 것으로 믿어지지 않는 빠른 스피드는 그의 큰 자산이었고, 무심코 골키퍼에게 백패스를 하던 수비수는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게다가 양발을 자유자재로 쓰며 개인기까지 화려한 그를 막을 선수는 지구상에 없었다. 언젠가 바르셀로나와의 엘 클라시코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대결을 뜻함)에서 두골을 넣어 팀을 승리로 이끌었을 때, 아르헨티나 출신의 메시가 그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형, 난 형처럼 축구를 잘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 사인 한 장만 해줄래?”


한번은 토니 나달과 술을 마신 적이 있다. 나달이 축구를 택한 후부터 알코올 중독에 빠진 토니는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야! 너 정도로 축구를 할 사람은 우글우글해. 하지만 너만큼 테니스를 잘 칠 수 있는 선수는 지구상에 없어. 너 우리 스페인 선수 중 그랜드슬램을 마지막으로 우승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 여자부의 콘치차 마르티네스가 1994년 우승한 게 전부야. 남자를 찾으려면 까마득하게 내려가야 한다고. 지금이라도 돌아와, 이 배신자야!”

스페인이 테니스를 못치는 걸 왜 자기 탓으로 몰아붙이는지 나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2006년 월드컵에서 스페인을 56년만의 4강으로 이끈 건 전혀 알아주지 않다니. 나달은 토니 삼촌과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2010년 월드컵에서 나달은 매 경기 결승골을 넣으며 스페인을 다시 4강에 올려놓았다. 독일에게 져 탈락하긴 했지만, 나달은 국민적 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달의 마음은 공허하기만 했다. 월드컵 기간 중 잠시 사라졌던 악몽이 귀국 후 다시 생겼다. 짜증스럽게 눈을 비비던 나달이 TV를 켜자 며칠 전 열렸던 윔블던 결승전을 다시 방영하고 있었다. 그때 봤던 페더러가 쉴 새 없이 영국의 희망이라는 머레이를 몰아붙이고 있다.

“페더러의 서브 에이스가 작열합니다. 앞으로 한 포인트만 더 따면 페더러 선수가 전무후무한 윔블던 8연패를 달성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페더러의 서비스가 센터라인을 가른다. 페더러의 우승이다. 27회 우승이라니, 이 친구 정말 대단하다.

“토니 삼촌도 참, 저런 선수가 버티고 있는데 나라고 별 수 있겠어?”


휴식을 위해 몬테카를로로 가는 날, 마드리드 공항에서 애인을 기다리던 나달 앞에 웬 사내가 섰다.

“헤이 나달! 나 모르겠나?”

의자에 앉은 채 머리를 들었더니 머리가 곱실한 남자가 운동복 차림으로 서 있는 게 보인다. 옆에는 약간 살이 있는 여자가 애 둘과 함께 다소곳한 표정으로 버티고 있다.

“누구...?”

나달이 앉은 채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가 웃었다.

“난 로저 페더러라고 하네. 자넬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여기서 보는군.”

페더러라니, 얼마 전 TV에서 보던 그 사내다.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 나달은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했다.

“아, 페더러! 세계 넘버 원 선수!”

나달의 칭찬에 페더러가 씨익 웃었다.

“그런데 날 만나고 싶어한 이유는? 혹시 당신 축구 팬?”

페더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난 축구 안좋아해. 그저 당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했어.”

무슨 말인지 몰라 나달이 얼굴을 찡그리자 페더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 당신은 모를 거야. 하지만 꼭 알아야 미안하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을 했으니 됐네. 나중에 보세.:

말을 마치자 페더러가 웃기 시작했다.

“음하하하하하하하하하.”


“무슨 일 있어요? 웬 남자랑 얘기하던데.”

애인의 말에 나달은 정신을 차렸다.

“응? 자기 왔구나. 페더러란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내게 미안하다잖아. 원 참.”

애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페더러? 혹시 그 전설의 테니스 선수?”

나달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애인은 페더러가 사라진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페더러! 사인 좀 해주세요. 저 당신 팬이어요!”

순간 나달은 페더러가 꿈속에서 자신을 두들겨 패던 그 남자랑 닮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핫, 나도 참.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달의 애인에게 사인을 해준 뒤 페더러는 잠시 멈춰선 채 1년 전을 떠올렸다. 2009년 호주오픈은 페더러에게 중요한 대회였다. 감염성 단핵구증으로 인해 2008년 시즌 극도의 부진을 겪은 터였으니까. 겨우 US오픈 하나만을 우승하는 데 그친데다 5년간 지켜오던 세계랭킹 1위 자리도 나달에게 내줬다. 나달과의 프랑스 오픈 결승에서 6-0의 치욕을 당한 거야 클레이코트라 어쩔 수 없다고 쳐도, 그토록 애착을 가졌던 윔블던마저 나달에게 내준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2009년 첫 대회인 호주오픈에서 우승해 명예회복을 해야 했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나달이 약한 하드코트니까 괜찮으려니 했던 호주오픈마저 나달에게 내주고 만 것. 이제 자신의 테니스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설움이 북받쳤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달이 자기를 위로하고 있다. 얄미운 녀석. 병주고 약주다니. 그게 서러워 더더욱 큰 소리를 내서 울었다. 그 장면이 TV로 생중계됐으니 황제로서의 위용은 다 무너져 버렸다. 나달, 그 녀석만 없다면....


라커룸에 들어가 망연자실 앉아 있는데, 웬 눈이 작은 남자가 그에게 걸어왔다. 이런 판국에 사인이라니. 페더러는 손을 내저어 그를 물리치려 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 걸어와 페더러 앞에 섰다.

“Do you want to rewind the time(시간을 돌리고 싶나)?"

그리 좋은 발음은 아니었지만 이 남자가 미쳤다는 건 알 수 있는 말이었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종을 하나 꺼냈다.

“Hit this bell if you want(그러고 싶다면 이 종을 쳐라).”

너무 피곤했고, 순전히 귀찮았기에 페더러는 종을 쳐서 남자를 좇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땡~~~”

종소리는 컸고, 오래도록 울렸다. 페더러는 그 종소리를 들으며 의식을 잃어갔다.


“이봐. 일어나! 경기 시간이 다 됐어.”

코치가 깨우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2003년, 윔블던 1회전을 앞둔 무렵이었다. 테니스 황제의 신화가 시작된 그 대회에서 페더러는 전 대회 우승자 휴이트를 누르고 첫 우승을 한다. 우승을 하고도 담담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방송사 리포터가 물었다.

“전혀 기쁘지 않나요?”

페더러는 그 말에 씨익 웃어 보였다.

“조금요. 전 제가 우승할 줄 미리 알고 있었거든요.”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2004년, 페더러는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읽는다.

“천재 축구선수 라파엘 나달, 레알 마드리드 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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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10-07-07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니까 나달이 계속 축구선수해서 레알에 입단했으면 좋았을텐데 그런 생각이 드신거죠?
이번 준결,결승 보니까 왜 나달이 잘 하는지 정말 잘 알겠더군요.
8월말에 있을 u.s오픈이 벌써부터 기대돼요.ㅎㅎ
나달 우승 기념으로 추천도 했어요.

마태우스 2010-07-07 18:21   좋아요 0 | URL
나달이 축구를 했으면 좋겠다는 게 아니라
나달이 위대한 선수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테니스판에 나달이 없었다면 남자테니스가 얼마나 재미없었겠어요?
어찌되었건 추천에 감사드립니다

paviana 2010-07-08 16:0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진짜 나달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시는거에요?
에이 아닐텐데 ㅋㅋ

루체오페르 2010-07-07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잘 모르고 관심이 없는 분야라 어떤 글인지 잘 모르겠으나 마태님 특유의 유머가 묻어나서 정독 하다보니 그림이 보이네요.ㅎㅎ

마태우스 2010-07-07 18:20   좋아요 0 | URL
오오, 지루한 얘기를 정독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꾸벅.

조선인 2010-07-07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테니스도, 축구도 몰라서... 쩝...

마태우스 2010-07-07 18:20   좋아요 0 | URL
죄송합니다. 혹시 스포츠 안좋아시는 분이 계실까봐 스포츠소설이라고 써놨다는....

... 2010-07-07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달의 등장과 함께 흥미를 잃었던 테니스의 세계에 다시 빠진 저로서는, 그 어떤 것보다 끔찍한 상상이군요-.-

마태우스 2010-07-08 09:25   좋아요 0 | URL
상상에 불과하니 너그러이 봐주세요. 제가 워낙 페더러 빠인지라...

2010-07-07 2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09 1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이드 2010-07-07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빠와 축빠는 서로 좀 별로인 편인데, 마태님은 야빠에 축빠에 테빠까지 ...
저도 도통 뭔소리인지 모르지만, 혹시 알까 끝까지 읽어보긴 했습니다 ...

물론 뭔소리인지 전혀 모르겠슴다만 ㅜㅠ

마태우스 2010-07-08 09:27   좋아요 0 | URL
저에 대해 잘못 알고 계시네요. 전 축빠가 아니구요, 축구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K리그 팀이 몇개인지도 잘 모르는데요. 글구 제 소설이 그렇게 어려웠나 다시한번 읽어보게 되네요. 나달이나 페더러를 전혀 몰라도 내용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stella.K 2010-07-07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3류 소설이었는데...
그래도 추천이 높은 편이군요. 역시 마태님은...짱이야!ㅋㅋ

마태우스 2010-07-08 09:28   좋아요 0 | URL
추천이 많은 건 소설이 좋아서라기보단 노력이 가상해서 혹은 친분 때문에 눌러주신 걸로 압니다. 여러가지로 고맙습니다.

moonnight 2010-07-08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었어요. 항상 느끼지만 이렇게 기발한 생각을 어떻게 하시는지 +_+;
근데, 마태님도 독일이 이길 거라고 짐작하셨군요! 저도 스페인이 이번에 네덜란드랑 결승 올라갔으면 좋겠다 바라면서도 아무래도 독일이 이기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새벽에 경기보고 깜짝 놀랐어요. 개인적으론 네덜란드가 이번 월드컵 우승했으면 좋겠어요!!! ^^

마태우스 2010-07-09 11:06   좋아요 0 | URL
부끄럽습니다. 글구 이번 월드컵은 참 틀리는 거의 연속이어요. 아르헨 하는 거 보고 우승하겠다 했는데 탈락. 독일이 진짜 잘한다 했더니 탈락. 브라질은 우승하겠지 했는데 탈락. 이건 뭐... 문어가 제일입니다.

2010-07-08 2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