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모 대학의 평가를 위해 출장을 와 있다.

의과대학 협의회에선 각 의대가 학생 교육을 잘 시키고 있는지를 5년마다 평가하는데

이건 제대로 환자를 볼 줄 아는 의사를 만들기 위한 수단의 일환이다.

각 대학에서 안목이 높은 사람들이 차출되어 심사를 수행하는데,

내가 뽑힌 것은 우리 학교 분들이 다들 바쁘신 탓이다.


그 대학 평가를 위해 그저께 아침 학교 앞에 도착해보니

“환영한다”는 플래카드가 세 개나 걸려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학장님과 수십명의 선생님들이 그 앞에 모여 있다가

우리가 차에서 내릴 때 뜨거운 박수를 쳐댔다.

그로부터 이틀간

학교 총장님과 보직자들, 그리고 그 대학 부속병원의 핵심인사들은

우리에게 잘보이기 위해 무지 애를 썼다.

개인 자격으로 이 학교를 찾았다면 만나 보지도 못할 별같은 분들이건만,

평가단이란 완장이 나로 하여금 그분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내가 고개를 두리번거리기만 해도 학교 보직자 두세분이 우르르 달려와

“뭐 찾으십니까?”를 물었고,

화장실에 갈 때마다 복도에 서있던 그분들은 “수고가 많으십니다”를 연발했다.

내 평생 이런 대접을 언제 또 받아보겠는가?(사실은 다음 주에도 평가가 있다^^)


이틀간의 평가가 끝나고 난 뒤 커다란 강의실에서 강평이 있었다.

총장님을 비롯해서 강의실에 모인 선생님들은

일곱명의 평가단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주의깊게 듣고 있었다.

우리가 하는 말을 노트에 적고 계신 총장님을 보면서

평가자와 피평가자에 대해 새삼 생각을 하게 됐다.


살다보면 누구나 피평가자가 될 수 있다.

학식과 지위가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건 마찬가지다.

예컨대 팬들에게 신처럼 군림하는 장동건도

그가 출연한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평가를 받는다.

영화 시사회에 배우들이 나와 “재미있게 봐주세요”라고 말하는 건

제발 대박이 나게 도와달라는 그네들의 진심이 담겨 있다.

국회의원들은 4년마다 한번씩 지역민들에게 납작 엎드려 한 표를 호소하고,

서민들에 대해 별 관심이 없던 우리 대통령님도

2년 전에는 ‘서민대통령’을 표방하며 국밥을 먹고 있었다.

책의 세계도 그건 마찬가지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

그 사람은 약자가 된다.

이왕이면 많이 팔리기를 기대하며 책을 내는지라

독자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촉각을 곤두세우기 마련이다.

나 역시 책이라고 분류될 만한 물체를 내놓은 경험이 있기에

독자의 한마디로 인해 저자가 얼마나 상처받는지를 잘 안다.

하지만 독자들 역시 자신의 소중한 돈을 투자해 책을 사는지라

책에 대해 얼마든지 평가할 권리가 있다.

나 또한 내가 산 책들에 대해 “이것도 책이냐”처럼

저자 마음에 못을 박는 글을 여러번 끄적여댔고,

그럴 땐 저자가 얼마나 상처를 받는지 별반 고려하지 않았다.


“저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취향이란 게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란 걸 모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기 취향에 맞지도 않는데 매번 그 저자의 책을 사서 읽고,

저자 가슴에 대못을 박는 하이드님의 행태가 이해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의 페이퍼는 저자에 대한 악의적 감정의 표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저자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난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페이퍼의 작성자가 평소 상처주기를 특기로 하는 하이드님이 아니었다면

역시 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니 내 페이퍼 역시 하이드님에 대해 평소 쌓였던 악의적 감정을 분출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저자가 헤이트하다는 말을 꼭 고따위로 하셔야 했는지,

그건 혹시 하이드님의 무의식에 포진할지도 모를  

미녀에 대한 반발심에서 비롯된 건 아닐런지“처럼  

한껏 세련된 표현을 써서 글을 올렸다면 좋았을 뻔했다.

내가 그러지 못한 건, 어제 저녁에 고삐풀린 말처럼 술을 마셔댄 탓이다.

소주를 두병쯤 마시고 나니 난 거의 야생마였고,

그런 상태에서 글을 쓰면 꼭 야생마가 날뛰면서 배설해 놓은 듯한 글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렇게 본다면 내가 강평 때 술을 안마시고 맨정신으로 임한 건 참 잘한 거다.


알라딘은 평화를 사랑하는 마을이다.

평소 잘 나타나지도 않다가 이따금씩 와서 분란을 조장하는 나는

어쩌면 알라딘 마을의 공공의 적일지 모른다.

다른 알라딘 마을 주민 분들께 사과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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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9-10-16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무슨 일인가 있었군요..
며칠전 겸손 포장마차 있던 자리 지나가면서
지금은 추억이 되어버린 우리의 오프라인 모임을 생각했었는데..
그때 똥광노래방 간것도 아세요? ㅎㅎ
잘 마무리 되시길 바랄뿐입니다.

paviana 2009-10-16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니까 술은 몸만들고 드셔야 되요.요즘 너무 건강에 신경안쓰신거 아니에요.

별족 2009-10-16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음, 무슨 생각이 드냐면, 그래도 '무플보다는 악플'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정혜윤님 책을 한 권도 사들이지 않는 저보다는, 세 권의 책을 모두 읽고 악플이라도 서평을 다는 하이드님이 저자의 입장에 더 고마운 사람이 아닐까요.

마태우스 2009-10-16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족님/안녕하세요 별족님. 이런 기회를 통해 인사를 나누려니 죄송한 마음이 드네요. 무플보다 악플이 좋을 수도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더이상 책을 쓰고싶지 않도록 만드는 글보다는 침묵이 더 낫답니다. 저자들은 상처를 주기위한 글에 생각보다 훨씬 더 상처를 받는답니다.
파비님/요즘 주1-2회밖에 술을 안마십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제는 술이 무한정 들어가더이다. 도수가 낮아져서 그런가...
세실님/세실님의 노래와 안무가 함께했던 그 노래방을 어찌 잊겠습니까. 그 포장마차두요!! 그 추억이 저로 하여금 많은 시련을 견디게 해줬답니다. 글구 마무리야 뭐 있겠습니까? 이제부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사는 거겠지요.

별족 2009-10-16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마태님, 저 마태님이랑 인사했는데요. 너무 오래전 일이기는 하지만서도. ㅋㅋ. 그런데, '상처를 주기 위해서' 혹평을 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도 혹평을 써본 적 있는데, 그 때 그런 평을 쓰는 이유는 '작가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서'라기 보다, '저랑 비슷한 취향의 누군가가 그 책을 선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거든요. 재미있는 책을 읽기에도 인생이 짧은데 아깝잖아요.

2009-10-16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족 2009-10-19 10:36   좋아요 0 | URL
저는 예전에 공항에서 연예인을 보고 '앗 00다'라고 외쳤는데, 알고보니 00이 아니라 XX였어요. 그러고 한참 후에 그 XX가 자살을 했다는 뉴스를 보고, 마음 속에 얼마나 미안한 마음이 들끓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런데, 상대방에게 상처받지 않게 말한다는 것은, 말을 시작한 이후부터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조심해도 상처받을 수 있어요. 내가 상처받았다고, 그 말을 한 그 사람이 나쁜 건 아니지 않나요. 그저 내가 단단해지는 것밖에 방법은 없어요. 공개적으로 품평을 받는 일을 한 사람이라면-자신의 글을 책으로 내고- 더더욱 단단해져야죠. 참, 저는 제 글을 비난했다고 제 편들면서 말을 보탰던 남친때문에 화가 난 적이 있었거든요. 이런 일이 벌어진 걸 알면 저자 분께서 더 기분 상하지 않을까요?

레와 2009-10-16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마태우스님이 공공의 적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괜찮아요.^^




2009-10-16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16 1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16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9-10-17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겝니까! 전 요즘 페이퍼나 쓸 뿐 리뷰를 통 생산해내질 못하고 있는데(정말이어요 리뷰를 마지막으로 쓴 게 대체 언제인지) 무슨 일이 무슨 일이!
그나저나 마태우스 님, 마태우스님이 애착을 가지신 그 책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여전히 혼자 갈피를 못잡고 있음) 그보다도, 글은 곧 글쓴이 자신이에요. 비평은 무조건, 무조건 너무 아프지요.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라 앨리스 스타인바흐 이야기였어요. 너무 무섭도록 공감이 가는 글.

아차차, 댓글 올리고 나서 보니 바로 아래에 있는 글이로군요.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고, 아이고 부끄럽습니다.

2009-10-17 0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립간 2009-10-17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 한번 못한 사람과 사랑에 상처 받은 사람 중 누가 더 불쌍할까요?

2009-10-17 2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9-10-18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그, 그런가요?^^ 근데 이건 나이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용...
마립간님/질문이 하도 어려워 아내에게 물어봤더니 아내도 잘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제가 굳이 답변을 고른다면 전자입니다.
속삭님/잉? 절 잘 모르시는군요! 이런 일로 서재를 나가다니요. 노무현 서거 때 필화사건을 겪고도 안나가고 버텻는걸요^^
주드님/헤헤, 주드님 반가워요. 이런 일로 이렇게 님을 뵙는군요^^